일의 발견/조안 B. 시올라/다우/2010


 일(Work)이란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했고, 호모는 인간을 미워한 신이 앙심을 품고는 인간을 고생시키는 것을 일이라고 하기도 했다. 창세기의 시작이 있었다면 그 시작과 함께 나타난 단어가 이 ‘일’이 아닐까?


  “이제 일하러 갑니다.”,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지요.”, “전 제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 “제 꿈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에요.” 다양한 의미로 일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문서작업을 얘기할 때도 있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을 말할 때도 있다. 노동자로서 일의 의미는 어떠할까? 나의 아버지는 평생 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졍년퇴직을 하셨다.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 였을까? 가족을 먹이고 따뜻한 옷과 집을 제공하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이제는 일을 하고 있지 않으신 아버지를 볼 때면 나의 일의 의미와 아버지의 일의 의미는 같은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때가 있다.  


 아버지세대가 일을 하던 때에는 우리나라도 종신고용이 널리 퍼져있었다. 한 직장에 들어가면 퇴직할 때까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IMF를 겪으면서 종신고용은 없어지고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미명아래에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런지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떤이에게는 생계의 수단이고 어떤이에게는 이상의 실현인 일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의해서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을 소개 받을 즈음에 우리 회사도 드디어 희망퇴직을 받으면서 이 회사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나가는 사람들이 나왔다. 일의 발견. 부제는 왜 ‘일’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는가이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에 이 책의 제목보다 부제가 눈에 더 오래 담겨 있었다.과연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이것은 악순환을 가져온다. 고용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경영자들 또한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고용인들은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고, 양측 모두 이상적인 일터를 찾아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프롤로그에서 나아갈 바를 한 문단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하고 고용주는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으면서 악순환의 어둠 속으로 가게 된다. 일에 대한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너무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잘못된 것인가? 결국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느껴진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의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방면 두 번째의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만 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 혹은 희망을 가진적은 없지만, 일을 통해서 뭔가를 더 얻을 수 있고 내가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던적은 없었다. 만약 희망을 줄 수 없는 일이라면 삶의 짐이되어 나를 고달프게 하고 출근하기 싫어질 것이 분명하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될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백수란 일할 자유가 없기에 여가를 즐길 자유조차 박탈당한 것이라고 한다. 일을 하게 됨으로써 휴식은 달콤하고 즐거워진다. 일을 하지 않는 휴식의 연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현재에서 가치 있는 일을 떠올려 본다. 전문가 장인이라는 직업들. 유명한 작가라고 생각해 볼때 그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작품을 하기위한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 작품-이 나오는면에서 갖고 싶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치 있는 일에 대한 직업에 대한 종류는 워낙 많지만 지금은 많이 떠오르지 않으니깐 일단 여기까지.


장인과 전문가는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의 공통점이 있다.  

1) 일과 여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1. 그들의 일은 그들 존재의 직접적인 확장이다
  2. 일에대한 헌신으로 사회구성원의 존경을 받는다
  3. 독립적이다


장인과 전문가의 공통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독립적이라는 것으로 누구도 그들이 일을 하고 있을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서두에 나왔다 나의 일을 하느냐, 남의 일을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아마도 사람들이 전문가나 장인을 꿈꾸는 것은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독립적인 부분에 좀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즉 고용되어 일할 때에는 고된 일과 더 나은 삶을 동일시 하기 어렵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과 관련된 문제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옳다. 자유와 권력 혹은 통제를 위한 투쟁은 오랫동안 주인과 노예들, 영주와 농노들, 그리고 고용주와 고용인들 사이에 존재해왔다. 그것은 일과 관련된 주요한 문제이다.


역시나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가에 따라 일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이 책의 두번째 파트에서 그 부분을 좀더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결국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닐까? 전문가가 되고 싶고 일과 관련된 사실들은 이미 산업이 어느정도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 정의는 이미 나온것 같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라고 주장한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계약제 하인과 산업 노동자가 장시간의 육체노동을 그들의 알량한 아메리칸 드림과 교환했다면, 조직인은 영혼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자유를 얻기 위한 인류의 투쟁역사는 매우 길다. 그 자유를 얻고 나서 다시 우리는 자유를 저당잡히고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예전의 육체 노동자들은 근로시간이 종료되면 자유를 얻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24시간 일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걸 보면 일의 역사는 자유주의로 간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로 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느낌을 본문 속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고 믿기를 바라지만, 사실 고용인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대가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따금씩 조직 내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노출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직장에서 이렇게 선을 긋기란 때로 쉽지 않다. 이 가느다란 선은 당신이 하게 될 일의 양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사생활과 내적 자아, 그리고 당신이 일을 하는데 필요한, 보다 공적인 측면들 사이에 경계를 긋는 것이다....얼마만큼 보여주고 얼마만큼 숨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조직내에서 사생활을 어느 정도를 노출시켜야 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문제이다. 과연 이것은 조직의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고용인의 모든것을 통제하에 두려는 회사의 편의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는 현실에서도 곳곳에 숨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면 관리하고 통제하기에는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지 않는 기계가 아닌 이상 통제 받기 보다는 자유를 꿈꾸고, 고용인과 고용주는 이 미묘한 선에서 눈치를 볼 것이다. 물론 더 많은 눈치는 고용인쪽에서 이겠지만. 


완전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한 근로자들에게 있어 일의 가장 힘든 부분은 정서적인 노력이다. 왜냐하면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출구는 없다>>의 주인공이 말했듯이 “타인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너무 자극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 자체뿐만이 아니고 그외에 그 일을 둘러싼 환경_사람을 포함한_을 보자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일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것의 또 다른 이점은 그것이 극적으로 뛰어난 기술, 목적에 대한 고귀한 헌신, 그리고 완벽함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대형스타가 게임과 팀의 급료 전부를 차지하는 프로 농구는 팀워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여느 회사를 가도 들을 수 있는 팀워크란 말이 있다. 팀워크를 향상시키기 위한 워크샵도 한다. 어떻게 하면 한 팀으로서 성과를 이룰 수 있을까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스포츠는 사업처럼, 사업은 스포츠처럼 활동하는 이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가 동경해 마지 않는 미국 프로스포츠는 스타플레이어가 이끌어간다. 회사에서도 스타플레이어 하나가 회사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팀워크에 대한 환상만으로 어물쩡 넘어가는게 아닐까?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팀워크에 대한 그 답이 될 것이다.


회사내의 팀들은 대부분 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분좋게 느끼기 위해 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불과하다....무엇보다도, 팀에서 일하는 것의 매력 중 하나는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게임에 참여하는 데 의의를 두거나 패배하는 것뿐인 팀에서 일하는 것은 어떠한가?


그렇다. 팀을 비롯한 수많은 경영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주었는가...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가장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회사원들까지도 고용주들에게 배신당할 수 있다면, 누구의 직장도 더는 안전할 수 없었다. 그들은 회사에 충성하는 조직인이었다. 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계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IMF구제금융위기가 왔을때 많은 회사들이 구조조정을 했고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원들이 회사 밖으로 나왔다. IMF를 탈출하고 나서 기업은 노동의 유연성을 주장하면서 여러가지 핑계로 고용인을 해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막상 닥쳐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 혀를 차면서 걱정했지만, 그 일이 현실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심지어 우리나라보다 이직과 재취업이 많은 미국에서도 이런 일들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장을 잃으면 한 사람의 신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말이 더 가혹하게 적용된다. 


직장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만들려는 1980년대의 시도는 많은 근로자들이 의심했던 대로 모두 거짓이엇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처럼 “집이란 가고 싶을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 언제든 당신을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가족같은 회사.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아니 많이 들리는 문구이다. 가족이라면, 왜 회사의 보다 나은 경쟁력확보를 위해 해고를 해야하다는 말인가. 회사는 가고 싶을때 언제든 갈 수 있고 언제나 나를 받아주는 곳은 아닌 것이 아니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형용사와 부사로 꾸며진 달콤한 문구는 종종 우리를 착각하게 만든다. 문구는 가족같은 회사이지만, 현실은 가족같이 보이고 싶은 회사일지 모르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일과 삶에까지 얘기한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현대인의 일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책을 덮을 때까지 거두지 않고 줄기차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삶 자체가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삶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고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일에 대한 의문을 떠올렸고 내가 고용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던 것 같다. 

 서점에 가면 많은 수의 경제경영서들이 즐비하게 깔려있다. 생각해보면 이 카테고리의 책들은 고용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의미에서 ‘일의 발견’은 고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신선한 책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는가?” 

일을 통해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를 다시 한번 반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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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그 친구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 토마스 A. 슈웨이크/위즈덤 하우스/ 2004

평범했던 그 친구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성공과 평범은 일견 같이 할 수 없는 단어들로 보인다. 왜냐하면 성공=비범 이라는 공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비범한 사람들-차별화가 되는 사람들-은 성공한다라고 익히 들어왔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아이러니컬하면서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제목을 뽑아냈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성공한 사람 100인의 인터뷰를 통해 이 같은 내용들을 끌어냈다고 한다. 


 목차를 펼쳐보았다. '성공 비결 01 처음부터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목표를 세워라, 계획을 세워라는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들어온 얘기들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잘 지킬 수 있다면 늘 얘기했을까? 여지껏 살아오면서 족쇄처럼, 그리고 지키지 못해서 죄책감이 들었던 ‘뚜렷한 목표’. 이 책은 그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말라고 한다. 제목과 목차에서 이미 나에게서 점수를 절반 따고 들어간 셈이다.


“인위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은 보통 큰 실수가 아니다” ...... “솔직히 말해서 구체적인 목표같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켈러허 회장은 파커를 다시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 다 앞으로 잘살 수 있겠군요”라고 말했다. 파커와 켈러허, 두 사람 모두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장기적인 성공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파커의 말에 따르면 능력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정해진 시간 안에 특정한 직함을 달겠다는 야망을 품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장기적인 목표에 장애가 된다니? 여지껏 어른들이나 선생님, 선배들이 얘기한 것과 판이하게 다른 말이 아닌가. 하지만 뒤에 이어오는 태평양 함대의 지휘관인 조셉 프루어 제독의 입을 통해 그 부족함을 부연 설명해 준다.


“계획은 8차선 도로 같은 것이다. 그만큼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원의 중심에 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자리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다. 이때 360°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 180° 역시 제대로 된 계획이라고 볼 수 없다. 범위를 1/4이하로 낮춘다면- 90°이하로 말이다-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원의 중심에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특정한 목표에 세밀하게 집중하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을 죄다 버리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목표를 세우지 말아야 하는 네가지 이유로는 첫째로는 너무 앞만, 멀리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현재의 일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로, 현재 하는 일에 집중해서 열심히 해야하다고 말한다. 둘째로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어야 하는데 “나는 이런 일을 할것이다. 이런 위치에 오를 것이다”라고 하는 사이에 동료들의 반감을 사기 일쑤란 얘기이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게 보게 된다. 젊고 유능한 친구들이 '하루 빨리 진급하겠어', '매니저가 되겠어' 하면서 공공연히 자신감을 드러내는 순간 직업적인 동료들을 적으로 만들게 되고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다. 나 조차도 그랬으니 말이다.


마음 속에 품은 야망은 강해야 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공으로 가는 길에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순간은 한두 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욕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 그 자리를 노리는 다른 모든 동료들의 경쟁자로 도장찍힌다. 너무 욕심이 없는 양 하는 것도 옳치 않지만 그 순간을 한 두 번으로 제한하는 것이 오히려 직장생활에는 도움이 될 터이다.


성공을 추구하다 좌절하고 낙담한 사람들 대부분은 지나친 자신감이나 자만심, 자기 연민 그리고 지나치게 구체적인 성공 계획이 뜻대로 오지 않는 데서 오는 충격으로 자기 혐오에 빠진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구체적인 성공계획에 집착하는 것이 과학적이지도 않고 인간 본성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인간의 성격과 우리 주변의 상황은 물처럼 유동적인데, 삶의 일부분을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만 고정하면 삶의 나머지 부분에 부작용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미래는 구속을 싫어할 뿐 아니라 강력하게 거부한다.


인간의 본성과 성공에 대한 애기를 물리학으로 풀고 있다. 그렇다 유동적이다 못해 불확실성의 극치를 달리는 인생에 있어서 구체적인 목표는 오히려 자기의 성장을 사로잡는 스스로의 족쇄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구체적인 목표가 실현되지 않았을때의 절망감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결합할때 받게 될 데미지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현실적인 꿈은 일치감치 접어라...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지독히 현실적이다. 단독직입적으로 물어보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 백이면 백 모두 “꿈을 꾼다고 해서 모두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시인한다.


긍정적인 사고, 꿈을 꾸면 이룰 수 있다. 희대의 사기책인 “시크릿”에서도 보면 계속 긍정적으로 그 꿈을 생각하면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차라리 체게바라의 ‘우리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꾸자.’란 말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저자는 비현실적인 꿈은 접고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라고 말하면서 재능을 찾는 과정을 정비하라고 한다. 환상, 취미, 재능으로 분류하는데 환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분야를, 취미는 상황만 도와준다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재능은 최고가 될 수 있는 분야를 말한다. 그리하여 환상에 대한 망상은 일찌감치 접고 재능을 키우고 취미를 활용하는 것을 권한다. 효과적인 분류법이다. 여기서 관심의 원과 영향력의 원을 떠올릴 수가 있는데 관심의 원이란 환상 그리고 취미의 바깥쪽이고 영향력의 원은 취미의 안쪽과 재능이 될 수 있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본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측 불가능하기때문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융통성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정말이지 그런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다시 예측 불가능과 불확실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멀티태스킹과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네럴리스트로 상황을 극복하라고 한다. 깊고 좁게 아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폭넓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리더는 세부적인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큰 그림을 봐야한다는 말과 유사하게 들린다. 하나의 분야에 고집하다 열려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앞서 얘기한 원의 중심에서 출발한 가능성의 원에 대한 이야기와도 맞물려 있는 듯 하다.


나는 제대로 된 자기 PR을 ‘M뒤집기’라고 부른다.나를 뜻하는 Me의 M을 뒤집으면 우리를 뜻하는 ‘We’가 된다. 이처럼 나 아닌 우리를 먼저 알리는 자랑은 얼마든지 해도 괜찮다


자기의 성공사례를 많이들 얘기하라고 한다. 자기 PR의 일종으로 말이다. 중간이하 말단까지는 눈에 띄기 위해 통하지만 중간급 이상이 되면 팀플레이가 필요하다. 매니저가 팀의 중요성보다 자기의 성공, 자기의 코칭능력과 매니지먼트만 자랑한다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결국 M뒤집기처럼 눈에 뜨이기 시작하면 나보다는 팀플레이를 우선시 하는 행동은 성공하기 위한 필수요소가 될 것이다.


첫째, 연줄은 일단 기회의 문까지는 데려다 준다. 둘째, 연줄은 여러분을 기회의 문 안에 계속 머무르도록 도와주지는 않는다.


현대사회에서는 휴먼 네트워킹이 중요하다고 한다. 직장에서 줄타기가 아니라 인적 네트워킹을 통해 필요한 일을, 필요한 정보들을 얻고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다. 연줄과 줄타기는 조금은 상이한 것 같지만, 말그대로이다. 연줄을 통해 기회의 문까지 가서 그들이 원하는 능력을 보여주면 문안에 머무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화려한 연줄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자아내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면 일을 가족과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라. 가족보다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 나가야한다. 가족에게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다른 무엇보다 가족이 우선이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가족보다 일이 우선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Work and Life Balance. 회사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직장동료들은 일과 가족 사이에 균형을 잡으라고 이 말을 많이 해준다. 이 말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일과 가족사이의 균형을 잡기란 대단히 힘들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힘들다고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인정할 것 인정하자인 것이다. 한 쪽을 완전히 잡기 위해서는 다른 한 쪽을 놓칠 수 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어떻게든 가족들을 위한 짬을 내라고 한다. 하아. 해법도 쉽지 않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일과 가족에게 분배하는 시간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인데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말로는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일의 성과에서 얻는 기쁨을 어찌할것인가. 지금은 나로서도 선택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잠을 줄여서 시간을 배분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뒷장의 내용들은 다른 성공학과 자기계발서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앞부분의 강렬한 워딩을 통해 충분히 몰입을 시켰고, 뒷부분은 웜다운으로 생각의 온도를 유지시키는 데에 충분했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세가지의 성공조건을 말한다. 첫번째 똑똑해야 하고 두번째 자신의 일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그게 아니면 최우선에 가까운 목표로 삼아야 하고 셋째로 정직하라고 한다. 책 서두에서 기존의 성공에 대한 관념적인 부분을 깨면서 관심을 집중하고 뒷부분은 평이하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정리를 했다. 서두를 제외하고는 여타 책들과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 계발에 대한 나의 죄책감을 앞에서 없어주었다고나 할까?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겐 이 책의 앞부분, 책의 절반만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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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제리 하비/ 엘도라도/2012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조직 속에 포함되어 살아간다. 처음은 가족, 학교 그 다음은 회사로 발전되어 간다. 창의성을 발휘하면 박수를 쳐주는 시간 속에서 점점 창의성은 고사하고 조직의 룰에 따라 시키는 대로만 해라로 점점 변질되어간다. 그러나 그 왜곡되어가는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난 정이 돌을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한국에서는  대다수의 무리 속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을 다른 나라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내가 말하는 방식은 '이야기를 말하는'방식과 같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문제는 내가 하는 말이 과연 나의 이야기, 즉 나의 진실이냐 하는 것"



생각되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서문을 읽다가 이 문장에 눈에 들어왔다. 나의 진실이냐 아니냐. 저자는 자기의 말이 너무 복잡한 경향이 있고 설교조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에 부정적이었지만, 이내 인정하기로 한다. 그래 나도 복잡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으니깐, 그냥 그게 내 말이라고 인정하자. 문제는 이야기가, 말이 진.실.하냐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하는 과정은 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 책의 원제는 애빌린 패러독스이다. 저자가 처가집에 가서 장인어른이 시작한 애빌린에 식사하러 가자는 말에 모두 동의를 하고 왕복 100여킬로를 다녀온다. 탈진한 그들은 저자의 “그래도 괜찮았죠?”라는 말에 사실은 원래 가고 싶지 않았다며 장인은 딸부부를 위해, 저자는 장인어른을 위해 싫지만 다녀온것을 토로하면서 본질적인 의도와는 다른 잘못된 결정에 모두 동참하면서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것을 에빌린 패러독스라 명명했다.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지는 5가지의 원인은 불안감, 부정적인 상상, 실질적인 위험, 소외에 대한 두려움, 성공과 실패의 심리적 역전이라고 한다. 조직에서 분리될까봐 두려워하는 인간의 소외감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주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기술, 경쟁, 개인주의, 일시성, 이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외로움의 공포는 자주 경험하지만 유대관계가 주는 만족감은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소외의 현실은 배웠지만 유대관계의 상호 호혜적인 기술은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이미 지구상에서 멸종한 공룡들처럼 자기 파괴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성향이 있는 조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잘못된 의사결정인 줄을 알면서도 조직에서 소외될까봐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로 동의하면서 일을 몰고가는 조직원들. 어디서나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자신의 경험담에 비추어 앞에서 말한 에빌린 패러독스라고 말한다. 에빌린 패러독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맞서서 스스로 해낸 인생의 승리를 맛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혼자다. 가끔 사랑이나 감동, 창의적인 일로 고독감에서 탈출하기도 하지만 그런 환희의 순간들은 모두 우리가 끌어다 모은 빛의 덩어리일 뿐, 그 빛의 가장자리에는 칠흑같은 어둠이 있을 뿐이다.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글을 읽는 내내 사람의 소외감에 대해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사람은 혼자라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소외감이라는 느낌을 경험해본적이 있는 나로서는 혼자라는 말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을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대하라.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로널드 D.랭은 "사람을 개인화된 주체(주관적으로)로 대하지 않고, 비개인화된 객체나 사물(객관적으로)로 대하는 것이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한다"고 지적했다.

황소케구리들은 케구리들을 객관적으로 다루려 한다. 그들은 케구리들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그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배제한 대가로 자신도 하나의 대상, 즉 사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성의 본질을 스스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조직이 조직원을 케구리-사회는 습지로 묘사-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케구리와 달리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객.관.적.이 눈에 띄었다."객관적으로 보자면,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객관적으로 얘기하면" 나는 얼마나 많은 객관을 남발하고 있던가. 객관적으로 말하는 그 상태가 객관적이지 않은데 말이다. 남발하는 객관성 속에 분명한 것은 나의 본질 또한 흐려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사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얘기하면서,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라며 나치에 적극 동참한 아돌프 아이히만과, 성경 속에 하느님의 명령에 아들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비 이성적인 얘기가 예시로 나온다. 이 둘은 관료주의의 상징으로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암묵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조직에 속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관료주의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원론적인 얘기로 돌아간다. 저자는 그  맹목적인 신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기를 말하고, 무엇이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겨가서 다른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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