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을유문화사/ 2011



 “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게 당황스러울 것이다. 너무나도 본질적인 질문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어떻게 대답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정의하는 답변을 해야 하는데, 보통은 자기가 하는 일을 얘기하지 않을까싶다. 상황을 그려보면, 명함을 건네면서 저는 이러이러한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 홍길동입니다라고 할 것 같다. 이 답변 속에서는 나라는 고유한 존재보다는 회사의 이름과 직책이 상대방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이 회사의 직무와 직책으로 얘기되어지는 것이다. 몸 담고 있는 회사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나를 말해주는 것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를 말해 준다면,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무려 나를 ‘정의’하는 일이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보다 더 나라는 본질에 가까울 것이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나라는 본질에서 좀 더 먼 거리에 있을 것이다. 아예 하고 있는 일이 없어진 사람들은 어떨까?


 IMF를 겪으면서 한국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조직 속의 나는 없어지고 헐벗은 나만 남았다. 나를 대신 얘기해주던 명함은 고사하고 매달 나오는 월급마저 없어져 버렸다. 그 당시 실직자들은 경제 생활의 주체로서의 나와 사회속에서 나를 동시에 잃어버리는 더블 공황상태에 내몰렸다. 평생을 몸담았던 회사에서 나가게 되면서  ‘나는 뭐였지?’나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지’라는 회한을 하지 않았을까. 조직을 벗어나 홀로된 사람은 이다지도 수세에 몰렸어야 했던가하는 상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위기의 시절이라 해도 회사내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이상은 회사에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대체 가능한 직무라면 언젠가는 평이한 시절이라도 그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새로운 직업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없어지는 직업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대체가 되고 있고 전통적인 직업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기업은 경영 활성화를 위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은 아니더라도 경영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줄 것이고 노동의 소멸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미해결과제이기 때문이다.


가치를 만드는 사람만이 언제나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치의 개념은 언제나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변화를 생활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다. 아울러 그 변화의 방향을 알고, 자신의 욕망과 그것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가치를 창출해야만 하는 시기가 점점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조직 속의 나로만 정의하지 말고 나만의 가치로 나를 정의해야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이런 변혁의 시기에 자기 변화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내라고 하는 책이다. 이 책의 키워드를 두가지를 뽑아내라면 ‘변화’와 ‘욕망’일 것이다. 나의 삶이 나의 욕망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바꾸라’는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 사람은 병이 생기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니까 변화를 통해 나의 욕망을 흐르게 하라고 말이다.


욕망이 없는 삶은 이미 속세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욕망과 화해하고 대항해 싸우는 수도사가 될 필요가 없다. 나는 욕망을 사랑한다. 욕망만큼 강력한 모티베이션은 없다.


아파트를 몇 채를 가지고 있고, 커다란 외제차를 몇 대를 굴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만이 욕망이 아니다. 자신의 바른 욕망은 공익에 기여하는 모습으로 실현이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얼마나 열정이 불타오르겠는가.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행동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절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집단과 사회가 강조된 대목이다. 이 속에는 개인에 대한 몫이 과소 평가되어 있다. 어쩌면 사회라는 개념 자체가 자유와는 적대관계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교육이란, 문명의 틀 속에서 주어진 사회적 전통에 아이들을 맞추는 것이다. 근신과 절제와 동일화가 사회의 미덕으로 강조되어 왔다.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지금까지 왔다. 사회적 전통에 맞게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어쩌면 교육과 나를 둘러싼 주위를 보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길을 그냥 걷고만 있었던 것같다. 절제와 근신은 어떻게 보면 욕망을 누르고 누르다보니 내면의 깊은 욕망을 끄집어내는 것도, 욕망을 바로보기도 버거운지도 모르겠다.


개혁은 치명적 급소를 항상 노출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혼돈과 혼란'이다. 변혁기의 특징인 카오스는 누구에게나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 세력은 그 속에서 희망을 보고, 기득권층은 그 속에서 절망을 본다.


 나의 욕망을 통해 동기부여하면서 변화를 시작하려고 할때,  혼란기를 지나가게 될 것이다. 불편한 변혁기는 일상으로 다시 회귀하려는 마음을 꿈틀꿈틀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는 것을 두려하지 말자. 변혁기에는 카오스를 만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대개의 경우 어제의 인간으로 남아 오늘을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성과 같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그대로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일단 구르기 시작하면 계속 구르려고 한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의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을 넘어설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이 단절은 뿌리깊은 '정지하고 싶은'관성을 극복함을 의미한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정지해 있으려고 하고 정지해 있는 사람은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한다. 익숙하고 안정화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안정화된 상태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와 전자들의 세계를 보면 바닥상태의 전자는 에너지 레벨이 제로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전자가 역동성을 띄기 시작할 때 비로서 에너지를 갖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의 세계도 이럴진대 이런 미립자로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다를 일이 있을까. 안정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균형이 깨졌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가 되고 싶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늘 더 좋은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늘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지금의 자기 자신보다 나아지려고 애쓰다보면, 나는 언젠가 나를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다.


 내가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내가 슈퍼맨이라면, 내가 상상을 초월할 천재라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있으면 좀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좀 더 나은 모습의 나를 꿈꾸는 것이었던 같다. 나 자신을 좀더 믿고 나를 사랑하면서 변화에 한발자국씩 다가선다면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가 되는데 가까워지지 않을까. 저 유명한 스티븐 코비박사의 말을 빌려 다시 말하자면 관심의 원은 줄이고 영향력의 원을 넓히는데 힘쓰라는 말로도 표현 할 수 있을 것같다.


 불행은 자기 밖에서, 다른 사람이 가치 있다고 인정해주는 무엇인가를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할 때부터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는 돈을 많이 가지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또 직장에서 승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한다...자기의 욕망에 솔직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세상이 부여하는 가치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타인의 욕망을 자신에게 투사하지 말자. 앞서 말했듯이 나의 내면의 욕망이야말로 본질적이고 지속가능한 동력이다. 타인의 욕망은 그것이 이루어지더라도 결국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라는 허기짐을 느낄게 분명하다.


 나는 나의 정의를 새롭게 하고 싶었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가 이력서나 명함 속에 있는 나가 아닌 다른 근본적인 나로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지만, 그나마 근접한 것이  내안에 있는 욕망의 덩어리로 만들어진게 나라는 사람이 아닐까? 나의 타오르는 욕망은 내 삶의 비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나의 삶을 아름답고 멋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내 안의 혁명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익숙한 것과의 결별’ 프롤로그에 불타는 배위의 갑판에서 살기 위해 칠흙같은 바다로 뛰어들어 기적적으로 생환한 앤디 모칸이라는 선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불타는 갑판위에서 확실한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바다로 뛰어들어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삶을 살것인가를  화두로 던지면서 이 책을 시작했다. 이제는 앤디 모칸이 아닌 내 차례인 것 같다. 나를 다시 정의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현실이라는 불타는 갑판에서, 내 욕망을 구명조끼로 삼아 가능한 삶을 위해 변화라는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문득 나이키의 카피가 떠오른다.

 “ JUST DO IT.”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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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경영학/ V/ 황금가지/ 2012


 프란시스 드 코폴라의 영화 대부를 보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라는 한 섬에서 시작된 마피아가의 일대기가 그려진다. 매력적인 배우 알 파치노가 마피아의 대부로 성장하는 내용이 대부 1, 2, 3으로 이어진다. 보스에 대한 충성과 경쟁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 주위의 경외심으로 만들어지는 대부의 삶은 흥미롭고 어떤 점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대부를 보기 전에 영웅본색을 먼저 만나면서 갱들의 의리에 대해 동경을 먼저 가지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마피아 경영학이란 책은 내용과는 별개로 그런 영화 속의 그림들이 그려져서 냉큼 집어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제목처럼 경영학이라기보다는 조직에서의 처세술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사회의 회사_조직_는 실상 마피아의 조직과 본질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의 군집에서 만들어지는 행동들은 어디서나 그 본질은 비슷하기때문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제 1부는 자기경영, 2부는 타인경영, 3부는 그 밖의 문제로 나뉘어져 있다. 목차와 그 목차의 주제들을 보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리 없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문장들로 내용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정상에 오른 이들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을 관리하는 기술의 달인이다. 이런 재능의 일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며, 또한 경험을 통해 얻어낸 부분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하 것은, 세상의 혹자들이 지니고 있는 성공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이 그런 재능의 일부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회사에서 직급이 올라가서 하게 되는 일은 매니저역할이다. 처음에는 소규모 팀을 매니지먼트하고 그 다음에 그 소규모 팀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되고 종국에는 회사 전체를 관리하는 역할로 차츰차츰 올라가게 된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져 있고 내 일을 위임해서 일을 처리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야 보다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게 된다. 고로 성공_사업의 확장이나 세력의 확장을 포함한_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성공한 기업체 간부들과 사업계 거물들의 경영 기술을 탐구하고 분석한 책은 시중에 넘칠 듯이 많이 나와 있다......이런 책들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역사 속에서 어느 카르텔 이상으로 규모가 큰 동시에 수익성이 으뜸이고 생명력이 강한 카르텔을 지휘한 이들의 정제된 지식말이다. 이는 다름아닌 마피아, 라 코사 노트스라, 신디케이트, 모브, 아우트피트 등등의 십여가지 명칭으로 불리는 조직 범죄 집단이다. 


이 마피아 경영학은 “V”라는 익명의 저자가 쓴 글이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이런 조직에 몸담았던 이였으리라. 성공한 기업의 요인을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가보면 인간의 본성과 역학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있다. 성공한 기업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가? 보통 기업의 수명이 10여년을 넘나든다고 할 때, 마피아보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오래된 조직이 얼마나 있을까. 이 책은 기업보다 오랜 세월 세력확장과 성공을 거듭한 마피아 조직의 지도철학과 수뇌부의 생각들을 담았다. 


 당신네의 임무나 우리네의 임무의 경우나 초심자가 지켜야 할 원칙은 간단하다. 입을 꾹 다물고 지낼 것. 항상 눈을 크게 뜰 것. 바지 지퍼를 잠글 것. 들은 대로 행동할 것.


책을 읽는 내내 나오는 얘기는 인내하고 침묵하고 자신을 많이 드러내지 말라고 한다. 조직의 초심자는 입을 꾹 다물고 주위를 살피라는 내용은 현대 사회의 초 일류 기업에서의 행동요령과 다르지 않다.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유능하건 유능하지 못하건, 복종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자는 부하로 삼지 말라. 특히 그 부하가 유능한 자일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하다...... 두목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어서 말해 보라는 요구가 있을 경우에 말하되 ‘두목의 입장’에서 말하도록 하라. 그런 상황이 아닐 때에는 계속 침묵을 지켜라.


두목이라는 단어를 상사로 교체해서 읽어보자. 인재가 자산이라는 요즈음에는 회사에 대한 로열티(loyalty)를 상당히 중요한 덕목으로 보고 있고, 상사의 입장에서 말하라는 얘기는 오래된 선배가 회사의 생활에서 성공하는 비법이라고 알려주는 이야기들과 흡사하지 않은가. 보고서를 쓰더라도 상사의 입장에서 쓴 보고서여야 하고, 반대의견을 제시한다면 상사가 말한 그 안건에 대한 반대가 아닌 상사가 일을 진행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가지 난관에 대한 반대_거기에 대한 대안도 있으면 좋다_를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성은 예측 가능하다. 인간은 자극과 동기에 반응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구시대의 가치 기준을 믿는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기준 가운데 주요 기준은 탐욕과 공포심이다.


마피아와 기업의 조직이 다르지 않은 것은, 구성원이 인간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조직구성원들이 믿는 가치 기준이 탐욕과 공포심이라는 말에 순간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탐욕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성장욕구 확장이고, 공포심은 사람관리 비결의 요체인 존경심의 다른 표현_책에서는 공포심은 존경심이 절정에 달한 상태라고 한다_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극단적인 비약은 아닐 것이다.


 효과적인 시간관리란 일하는 순간순간을 최고의 시간대로 만든다는 걸 의미한다. 동시에 하루 중의 몇 시간, 일주일 중의 며칠, 일 년 중의 몇 주일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대를 확보한다는 걸 뜻한다. 이는 일벌레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효과적인 시간관리의 목표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영리하게 일하되 무리하게 하지 말라.


시간관리를 잘 한다는 것은 짧은 시간이라도 그 순간을 최고의 시간으로 만들기위해 열정을 다하라는 말로 들린다. 하루를 25시간으로 늘릴 수 없다면 자기를 둘러싼 일들을 모두 떠안지는 말자. 위임이 가능한 일이라면 위임하고 자신이 최선의 열정을 다할  수 있는 부분에 쏟아내는 것이 상식선에서 접근이 가능한 시간관리가 아닐까. 저자는 다른 사람에게 갈 수록 많은 일을 더 위임하라고까지 말한다. 차후에는 그 사람을 관리하는 것으로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이 없는 사람은 자질이 없는 사람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예수조차도 수없이 많았다.

항상 최악의 적을 염두에 두어라. 그러면 좀처럼 그릇 판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복수는 기껏 잘 먹어 봤자 차가운 음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사회생활하면서 적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그렇다.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적은 존재했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이들도 적이 즐비한데, 실수가 나오기 마련인 일반사람들은 오죽할까. 단, 사회_조직_생활에서는 최악의 적을 염두하고 적을 두려워해야 더 큰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졸개들은 대부분 자신이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인간인지 잘 모른다. 주로 부관들을 통해서, 졸개들에게 자신이 다소나마 가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줘라......말을 바꾸면, 당신을 위해 행하는 일로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두목이라는 단어를 상사로 바꿔 읽어보았듯이, 이번에는 졸개라는 단어를 직원으로 바꾸어서 읽어보자. 맡겨진 일에 자발적으로 열의를 갖게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들라는 말인데, 자신이 직원이라는 위치에 있다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 경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자극적인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외부인이 당신의 조직원에게 이의를 제기했을 경우에, 그가 누구건 상관없이 당신의 조직에 속한 자가 늘 옳다. 외부인이 아니라 당신의 졸개한테 잘못이 있을지라도 당신의 졸개가 옳다. 잘잘못은 나중에 당신과 졸개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따지면 된다.


일상 속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야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늘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잘잘못에 상관없이 당신의 조직에 속한 자가 늘 옳다라는 말은, 사람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들의 이익과 당신의 이익을 동일시 할 수 있고, 조직원의 충성심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내용인 것이다. 앞서에도 말했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사람을 관리하는 자리에 올라간 이들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임과 그 위임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잊지 말자. 


모든 규칙은 독단적인 경계선일 뿐이어서 모험심이 강한 사람들이 걸려들게 되어 있다. 규칙을 깨려고 하는 자들, 이들이 결국에 가선 가장 우수한 직원임이 밝혀진다.


규칙은, 여기까지는 안전하다라는 경계선(Borderline)을 알려준다. 하지만 안전한 경계 안에서 안주하고만 있다가는 도태되기 마련이다. 안정화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사건도, 어떤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 규범을 어기라는 얘기가 아니다. 열정적으로 기존 규칙을 더 진화시켜 자신의 것으로 해석할 때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시행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피를 부르는 야만적인 행동은 적의 완전한 궤멸을 목표로 한 것이라는 얘기다. 성공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를 마음이 없는가? 친절한 사내, 좋은 사내가 되려고 해서는 사무실 바닥에 고급 카펫을 깔 날이 요원하다.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차라리 개를 한 마리 키워라.

 권력투쟁에서 도덕성 운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이다. 조직 내부의 적이건 외부의 적이건 그들은 당신이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마찬가지 관점에서 당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 자신의 행동을 고결한 행동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권력 투쟁에서 당신은 전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가능한 한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이자 경제적인 길을 모색해야 한다.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원색적인 책이다. 인간의 본성인 탐욕과 허영, 공포를 통한 역학관계의 처세술 이야기들이다. 책을 덮는 순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사마천의 사기를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군상의 집합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지 않았다. 직장을 총성없는 전쟁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총성있는 직장을 가진 자들이 마피아다. 실체화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과 실체화된 무기 대신 이성과 논리로 경쟁자들과 싸우는 현대의 직장인들에게 원색적으로 조언하는 '마피아 경영학'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포함한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아래 문장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여기 문장 말미에 있는 “당신”이 꼭 나였으면 하는 바람과 다짐으로 말이다.  


 권력은 인간한테 암세포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권력을 손에 넣으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해지면서, 이전까지 지니고 있었을 쓸만한 여러 재질이 자취를 감추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조만간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만이 남는다, 완전히 안으로 웅크린 자아만이 남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자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라.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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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두근거리는 삶을 살아라/ 마이크 맥매너스/ 시대의 창/2011 




 논어의 위정편에 나오는 구절에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는 말이 있다. 70세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않았다라는 말인데, 과연 그때에 이르르면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까. 결국 70세에나 이르러서야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일까  간혹 궁금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불화들의 대부분은 하고 싶은대로 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세상 어디에 누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느냐? 그냥 적당히 맞추면서 사는 거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들을 해준다. 과연 세상은 그렇게 타협하면서 살아야 하는 곳인가? 혹시나 우리는 만들어진 사회적 통념을 제대로 바라보지않고, 그 말이 맞는지 안맞는지 따져 본적이 있을까?


 가슴 두근거리는 삶을 살아라는 거기에서 출발한 책으로 보여진다. 제목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삶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에 열정을 쏟아부으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사회적 통념에 휘둘리지 말고 본인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고 싶은 길을 가면, 가는 길에 어느정도의 등락은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 길을 제대로 걷게 되고, 거기에 따른 안정과 본인의 희망에 근접해간다고 말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라

당신의 재능과 기술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뭔가를 달성하려고 억지로 의욕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능력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

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한참을 망설이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다.

당신의 꿈은 모두 이루어진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절대 포기하지마라.

목표를 세우기보다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시간을 핑계 삼지 마라. 그것이 무엇이든 시간은 충분히 주어진다.

간절한 바람이 있을 때 그것이 소망임을 확신하고 시종일관 그것만을 생각한다면 그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당신은 이 말에 동의하는가?


 언젠부터인가 책의 서문을 주의 깊게 살피게 되었는데, 서문에서 흥미를 일으키지 못하는 책은 마지막에 가서도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서문에서 기존의 관념적인 정설(?)에 반기를 들면서 시선을 집중시킨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죄의식을 해방시켜 주면서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 시종일관 어느 문제에서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_우유부단하다는 나쁜 말도 있다_ 나는, 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한참을 망설이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라는 말에 안도와 희망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나는 서문만으로도 가슴두근거리는 삶에 대한 호기심이 꿈틀되기 시작했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몸과 마음이 흥미와 호기심을 좇아 움직여야 한다.


 자연스러움. 무엇을 하던 간에 자연스러운 행동은 갈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우리 본래의 모습은 어린아이같은 원초적인 흥미와 호기심이 아니었던가. 직관을 무시하지 말고 스스로 마음에 끌리는 것을 좇아가는 것이 본래의 모습으로 가는 첫 단계로 보여진다.


내가 많은 스트레스로 괴로워하고 인생의 균형을 잃고 흔들리게 된 배경에는 사회통념이 되어버린 잘못된 사고와 생활방식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회 통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생의 방향성을 잃고 있다. 이런 사회 통념은 겉보기에는 이치에 맞고 실용적인 지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삶의 중심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서 받아들이는 사회 통념이 얼마나 나의 삶을 많이 흔들고 있을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훌륭한 사회인이 되어라, 돈이 되는 직업을 찾아서 출세해라, 문제를 일으키거나 옆길로 새지마라 등등 정해진대로 살면서 세상과 동화되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라고 통념들은 말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자기를 타이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 이런 욕구와 삶의 뒤틀림이 조금씩 쌓여서 인생의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는 책임감, 의욕, 적성, 능숙함, 결단, 타협, 우선순위, 현실성에 대한 누구나 믿고 있는 거짓말-사회 통념이라고 봐도 무관하겠다-에 대해서 아래의 내용으로 반기를 들고 있다.

1. 책임감 - 스스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책임 있는 행동이고 그 사람이 지는 최고의 책임이다.

2. 의욕 - 하기 싫은 일에 억지로 의욕을 끌어올리지 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비로서 창조력을 낳는다.

3. 적성 - 적성에 맞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굳이 하지 마라. 적성에 맞지 않다고 해도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면 반드시 시도해보라.

4. 능숙함 - 능숙하지 못하더라도 열정이 있다면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5. 결단 - 결단은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내리는 것이 좋다.

6. 타협 -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할 수 있다. 아니,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모두 해야 한다. 실제로 풍요로운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면서 살고 있다.

7. 우선순위 - 우선순위는 인생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8. 현실성 - 현실성이 없다는 비판을 들어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마라. 실재하는 현실은 오직 하나, 당신이 자신에게 창조해주는 현실밖에 없다.


 너무 이상적인 말들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이 스스로를 죄의식에서 해방시키고 내면이 시키는 욕구에 대해 달려가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짧지만 의미를 심어주기에는 충분한 문장들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세상이 말하는 책임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죄책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죄책감은 두려움의 감정서 생겨난다. 세상이 기대하는 일을 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아할 것인가...돈이 없으면 아무도 나와 어울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좋아하는 일은 나이 들어 정년퇴직한 뒤에 하자...


 자주 드는 생각이고 주변에서 많이 들었던 익숙한 말들이다. 이에 저자는 꿈을 좇는 삶-자신의 소망과 욕구를 충실히 이행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책임 있는 삶이라고 강변한다. 자신의 소망과 욕구를 이행하면서 얻는 활력으로, 결국에는 주위에까지 밝은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안에는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쫓으려는 욕구가 있고, 그 안에 존재 의의가 있으므로 그것을 살려 사회와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책임감이고 존재의 의의라고 말이다.


잠재의식이 틀린 경우는 없다. 당신의 중심에 망설이는 기분이 있고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경우, 그것은 잠재의식에서 보내는 메세지다. 잠재의식은 타협을 모른다. 받아들일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둘 중 하나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얘기.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결단을 내려야 할때 망설임이 든다면 직관적인 본인의 내면의 목소리에 맞추어서 결정하는게 되려 정답에 근접할 수 있다.


인생이 타협의 산물이고 양자택일의 결과라는 말이 아직 존재하는 것은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생의 디자이너이자 엔지니어이고 설계자다. 자신의 꿈을 충족해줄 인생을 직접 디자인해보자.


흑과 백 밖에 존재하는 것이 세상이 아니고 모든 결정이 양자택일의 논리가 아닐진데, 다른 하나를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내가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라면?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모두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통념이 아니라 자신의 유연한 사고와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만이 필요할 뿐이다.


하나의 꿈만을 언제나 우선순위로 두면 반드시 인생의 균형이 깨진다. 또 모든 일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사람은 인간이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복합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인간을 마치 공장의 기계처럼 여기게 된다.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우선 순위가 필요하다라는 말은 항상 듣지 않았던가.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일을 순서대로 진행하는 것과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을 지을때는 토대부터 지붕까지 순서대로 짓지만, 그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디있냐는 말이다. 또, 꿈_하나의 꿈이 아니다_이란 우선 순위를 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책 ‘정의란 무엇인가’의 서두에 나오는 한 명의 생명과 여러 명의 생명 중 누가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이루고 싶은 여러 꿈 중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어디있겠는가? 순위를 매기는 순간, 하위 리스트에 있는 꿈들은 실천할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진다.


누군가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할 때 그 말의 진짜 의미는 ‘당신이 하고 싶은 것 외에 다른 일을 알아보라’는 뜻이다.

 알고 있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문장이다. 현실적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부정의 의미는 자신의 꿈조차도 철저히 재단해버리기 일쑤이다. 어떻게 하면 꿈을 향한 길에 있는 이런 의식의 장애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저자는 현실적이라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그것을 결정하는 잣대는 바로 본인의 주관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내면의 의지와 욕망을 믿고 따르는 것이란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꿈의 실행-저자의 소스 프로그램-을 위해서 6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1. 꿈의 리스트를 적어보라.
  2. 모두 당장 동시에 실행하라.
  3. 같은 양의 정열을 쏟아부어라.
  4.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라.
  5. 목표를 세우지 마라.
  6.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직관을 믿어라.

 6가지 방법 중 나의 시선을 사로 잡은 건 동시실행과 목표를 세우지마라, 그리고 직관이라는 말이었다. 모두 당장 동시에 실행하라는 말은 좋아하는 일에, 하고 싶은 일에, 우선순위는 없다는 말이다. 저자는 다이아몬드 가공을 예를 든다. 다이아몬드를 가공할 때 어느 한면이라도 소홀히 하면 그 다이아몬드는 형편없는 가치로 전락한다.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고 동시에 실행하면, 새로운세계가 열릴것이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한번에 하나씩, 그리고 불가능한 것은 버리면서 가는 것이라는 말은 관념의 세계가 만든 것이라 한다. 나의  꿈에 소중함의 순서는 있을 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그 하나 하나가 개별적으로 모두 다 소중한 것이다.


 목표를 세우지 마라는 이전에 본 ‘평범했던 그 친구는 어떻게 성공했을까’에도 언급되었던 내용이다. 목표에 사로잡히면 귀중한 체험이나 멋진 기회를 놓치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패배감과 강박감에 시달린다.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은 다른 많은 욕구를 포기해야한다는 뜻이므로, 목표가 아니라 나아갈 방향을 정해놓고 한걸음 한걸음 가는 것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 낼거라고 한다. 목표가 아닌 방향이라는 말, 심히 공감이 될 수 밖에 없다.


 직관의 길을 따라라,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는 이 책을 관통하는 이야기로 보인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결정을 믿고, 하고 싶은 바대로 따라가면 꿈에 이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단, 감정과 직관을 혼동하는 것만 주의한다면 말이다. 

 

가슴 두근거리는 삶은 나의 존재 의의에 대해 되뇌여보는 내용이다. 결국 나 자신 안에서 소망과 열정을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덮고 있는 사회적 통념을 걷어내고 나의 본질을, 나의 욕망을 분명히 하는대서 가슴 두근거리는 삶은 시작된다. 우리는 아직 자기 자신을 덜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가 묻는 모든 답은 질문하는 본인이 가지고 있다라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나의 욕망을 끄집어내서 분명히 하고 직관-자기 내면-을 믿고 내 안에 숨은 나의 능력을 깨워서 실현해보자.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오히려 그 꿈이 실현됐을 때,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본문의 문장을 떠올리며, 오늘 나는 일단은 책에 나오는대로 꿈의 리스트 작성으로 한걸음을 떼어 본다, 나의 꿈을 향해.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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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발견/조안 B. 시올라/다우/2010


 일(Work)이란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했고, 호모는 인간을 미워한 신이 앙심을 품고는 인간을 고생시키는 것을 일이라고 하기도 했다. 창세기의 시작이 있었다면 그 시작과 함께 나타난 단어가 이 ‘일’이 아닐까?


  “이제 일하러 갑니다.”,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지요.”, “전 제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 “제 꿈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에요.” 다양한 의미로 일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문서작업을 얘기할 때도 있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을 말할 때도 있다. 노동자로서 일의 의미는 어떠할까? 나의 아버지는 평생 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졍년퇴직을 하셨다.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 였을까? 가족을 먹이고 따뜻한 옷과 집을 제공하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이제는 일을 하고 있지 않으신 아버지를 볼 때면 나의 일의 의미와 아버지의 일의 의미는 같은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때가 있다.  


 아버지세대가 일을 하던 때에는 우리나라도 종신고용이 널리 퍼져있었다. 한 직장에 들어가면 퇴직할 때까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IMF를 겪으면서 종신고용은 없어지고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미명아래에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런지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떤이에게는 생계의 수단이고 어떤이에게는 이상의 실현인 일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의해서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을 소개 받을 즈음에 우리 회사도 드디어 희망퇴직을 받으면서 이 회사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나가는 사람들이 나왔다. 일의 발견. 부제는 왜 ‘일’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는가이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에 이 책의 제목보다 부제가 눈에 더 오래 담겨 있었다.과연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이것은 악순환을 가져온다. 고용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경영자들 또한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고용인들은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고, 양측 모두 이상적인 일터를 찾아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프롤로그에서 나아갈 바를 한 문단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하고 고용주는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으면서 악순환의 어둠 속으로 가게 된다. 일에 대한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너무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잘못된 것인가? 결국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느껴진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의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방면 두 번째의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만 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 혹은 희망을 가진적은 없지만, 일을 통해서 뭔가를 더 얻을 수 있고 내가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던적은 없었다. 만약 희망을 줄 수 없는 일이라면 삶의 짐이되어 나를 고달프게 하고 출근하기 싫어질 것이 분명하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될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백수란 일할 자유가 없기에 여가를 즐길 자유조차 박탈당한 것이라고 한다. 일을 하게 됨으로써 휴식은 달콤하고 즐거워진다. 일을 하지 않는 휴식의 연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현재에서 가치 있는 일을 떠올려 본다. 전문가 장인이라는 직업들. 유명한 작가라고 생각해 볼때 그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작품을 하기위한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 작품-이 나오는면에서 갖고 싶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치 있는 일에 대한 직업에 대한 종류는 워낙 많지만 지금은 많이 떠오르지 않으니깐 일단 여기까지.


장인과 전문가는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의 공통점이 있다.  

1) 일과 여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1. 그들의 일은 그들 존재의 직접적인 확장이다
  2. 일에대한 헌신으로 사회구성원의 존경을 받는다
  3. 독립적이다


장인과 전문가의 공통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독립적이라는 것으로 누구도 그들이 일을 하고 있을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서두에 나왔다 나의 일을 하느냐, 남의 일을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아마도 사람들이 전문가나 장인을 꿈꾸는 것은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독립적인 부분에 좀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즉 고용되어 일할 때에는 고된 일과 더 나은 삶을 동일시 하기 어렵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과 관련된 문제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옳다. 자유와 권력 혹은 통제를 위한 투쟁은 오랫동안 주인과 노예들, 영주와 농노들, 그리고 고용주와 고용인들 사이에 존재해왔다. 그것은 일과 관련된 주요한 문제이다.


역시나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가에 따라 일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이 책의 두번째 파트에서 그 부분을 좀더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결국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닐까? 전문가가 되고 싶고 일과 관련된 사실들은 이미 산업이 어느정도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 정의는 이미 나온것 같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라고 주장한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계약제 하인과 산업 노동자가 장시간의 육체노동을 그들의 알량한 아메리칸 드림과 교환했다면, 조직인은 영혼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자유를 얻기 위한 인류의 투쟁역사는 매우 길다. 그 자유를 얻고 나서 다시 우리는 자유를 저당잡히고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예전의 육체 노동자들은 근로시간이 종료되면 자유를 얻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24시간 일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걸 보면 일의 역사는 자유주의로 간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로 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느낌을 본문 속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고 믿기를 바라지만, 사실 고용인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대가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따금씩 조직 내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노출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직장에서 이렇게 선을 긋기란 때로 쉽지 않다. 이 가느다란 선은 당신이 하게 될 일의 양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사생활과 내적 자아, 그리고 당신이 일을 하는데 필요한, 보다 공적인 측면들 사이에 경계를 긋는 것이다....얼마만큼 보여주고 얼마만큼 숨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조직내에서 사생활을 어느 정도를 노출시켜야 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문제이다. 과연 이것은 조직의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고용인의 모든것을 통제하에 두려는 회사의 편의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는 현실에서도 곳곳에 숨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면 관리하고 통제하기에는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지 않는 기계가 아닌 이상 통제 받기 보다는 자유를 꿈꾸고, 고용인과 고용주는 이 미묘한 선에서 눈치를 볼 것이다. 물론 더 많은 눈치는 고용인쪽에서 이겠지만. 


완전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한 근로자들에게 있어 일의 가장 힘든 부분은 정서적인 노력이다. 왜냐하면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출구는 없다>>의 주인공이 말했듯이 “타인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너무 자극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 자체뿐만이 아니고 그외에 그 일을 둘러싼 환경_사람을 포함한_을 보자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일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것의 또 다른 이점은 그것이 극적으로 뛰어난 기술, 목적에 대한 고귀한 헌신, 그리고 완벽함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대형스타가 게임과 팀의 급료 전부를 차지하는 프로 농구는 팀워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여느 회사를 가도 들을 수 있는 팀워크란 말이 있다. 팀워크를 향상시키기 위한 워크샵도 한다. 어떻게 하면 한 팀으로서 성과를 이룰 수 있을까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스포츠는 사업처럼, 사업은 스포츠처럼 활동하는 이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가 동경해 마지 않는 미국 프로스포츠는 스타플레이어가 이끌어간다. 회사에서도 스타플레이어 하나가 회사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팀워크에 대한 환상만으로 어물쩡 넘어가는게 아닐까?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팀워크에 대한 그 답이 될 것이다.


회사내의 팀들은 대부분 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분좋게 느끼기 위해 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불과하다....무엇보다도, 팀에서 일하는 것의 매력 중 하나는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게임에 참여하는 데 의의를 두거나 패배하는 것뿐인 팀에서 일하는 것은 어떠한가?


그렇다. 팀을 비롯한 수많은 경영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주었는가...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가장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회사원들까지도 고용주들에게 배신당할 수 있다면, 누구의 직장도 더는 안전할 수 없었다. 그들은 회사에 충성하는 조직인이었다. 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계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IMF구제금융위기가 왔을때 많은 회사들이 구조조정을 했고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원들이 회사 밖으로 나왔다. IMF를 탈출하고 나서 기업은 노동의 유연성을 주장하면서 여러가지 핑계로 고용인을 해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막상 닥쳐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 혀를 차면서 걱정했지만, 그 일이 현실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심지어 우리나라보다 이직과 재취업이 많은 미국에서도 이런 일들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장을 잃으면 한 사람의 신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말이 더 가혹하게 적용된다. 


직장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만들려는 1980년대의 시도는 많은 근로자들이 의심했던 대로 모두 거짓이엇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처럼 “집이란 가고 싶을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 언제든 당신을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가족같은 회사.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아니 많이 들리는 문구이다. 가족이라면, 왜 회사의 보다 나은 경쟁력확보를 위해 해고를 해야하다는 말인가. 회사는 가고 싶을때 언제든 갈 수 있고 언제나 나를 받아주는 곳은 아닌 것이 아니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형용사와 부사로 꾸며진 달콤한 문구는 종종 우리를 착각하게 만든다. 문구는 가족같은 회사이지만, 현실은 가족같이 보이고 싶은 회사일지 모르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일과 삶에까지 얘기한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현대인의 일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책을 덮을 때까지 거두지 않고 줄기차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삶 자체가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삶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고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일에 대한 의문을 떠올렸고 내가 고용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던 것 같다. 

 서점에 가면 많은 수의 경제경영서들이 즐비하게 깔려있다. 생각해보면 이 카테고리의 책들은 고용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의미에서 ‘일의 발견’은 고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신선한 책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는가?” 

일을 통해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를 다시 한번 반문해 본다.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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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그 친구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 토마스 A. 슈웨이크/위즈덤 하우스/ 2004

평범했던 그 친구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성공과 평범은 일견 같이 할 수 없는 단어들로 보인다. 왜냐하면 성공=비범 이라는 공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비범한 사람들-차별화가 되는 사람들-은 성공한다라고 익히 들어왔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은 아이러니컬하면서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제목을 뽑아냈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성공한 사람 100인의 인터뷰를 통해 이 같은 내용들을 끌어냈다고 한다. 


 목차를 펼쳐보았다. '성공 비결 01 처음부터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목표를 세워라, 계획을 세워라는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들어온 얘기들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잘 지킬 수 있다면 늘 얘기했을까? 여지껏 살아오면서 족쇄처럼, 그리고 지키지 못해서 죄책감이 들었던 ‘뚜렷한 목표’. 이 책은 그 뚜렷한 목표를 세우지 말라고 한다. 제목과 목차에서 이미 나에게서 점수를 절반 따고 들어간 셈이다.


“인위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은 보통 큰 실수가 아니다” ...... “솔직히 말해서 구체적인 목표같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켈러허 회장은 파커를 다시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 다 앞으로 잘살 수 있겠군요”라고 말했다. 파커와 켈러허, 두 사람 모두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장기적인 성공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다. 파커의 말에 따르면 능력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정해진 시간 안에 특정한 직함을 달겠다는 야망을 품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장기적인 목표에 장애가 된다니? 여지껏 어른들이나 선생님, 선배들이 얘기한 것과 판이하게 다른 말이 아닌가. 하지만 뒤에 이어오는 태평양 함대의 지휘관인 조셉 프루어 제독의 입을 통해 그 부족함을 부연 설명해 준다.


“계획은 8차선 도로 같은 것이다. 그만큼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원의 중심에 있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자리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다. 이때 360°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계획이라고 할 수 없다. 180° 역시 제대로 된 계획이라고 볼 수 없다. 범위를 1/4이하로 낮춘다면- 90°이하로 말이다-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원의 중심에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특정한 목표에 세밀하게 집중하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을 죄다 버리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목표를 세우지 말아야 하는 네가지 이유로는 첫째로는 너무 앞만, 멀리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현재의 일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로, 현재 하는 일에 집중해서 열심히 해야하다고 말한다. 둘째로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어야 하는데 “나는 이런 일을 할것이다. 이런 위치에 오를 것이다”라고 하는 사이에 동료들의 반감을 사기 일쑤란 얘기이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게 보게 된다. 젊고 유능한 친구들이 '하루 빨리 진급하겠어', '매니저가 되겠어' 하면서 공공연히 자신감을 드러내는 순간 직업적인 동료들을 적으로 만들게 되고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다. 나 조차도 그랬으니 말이다.


마음 속에 품은 야망은 강해야 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공으로 가는 길에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순간은 한두 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욕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순간, 그 자리를 노리는 다른 모든 동료들의 경쟁자로 도장찍힌다. 너무 욕심이 없는 양 하는 것도 옳치 않지만 그 순간을 한 두 번으로 제한하는 것이 오히려 직장생활에는 도움이 될 터이다.


성공을 추구하다 좌절하고 낙담한 사람들 대부분은 지나친 자신감이나 자만심, 자기 연민 그리고 지나치게 구체적인 성공 계획이 뜻대로 오지 않는 데서 오는 충격으로 자기 혐오에 빠진다.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구체적인 성공계획에 집착하는 것이 과학적이지도 않고 인간 본성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인간의 성격과 우리 주변의 상황은 물처럼 유동적인데, 삶의 일부분을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만 고정하면 삶의 나머지 부분에 부작용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미래는 구속을 싫어할 뿐 아니라 강력하게 거부한다.


인간의 본성과 성공에 대한 애기를 물리학으로 풀고 있다. 그렇다 유동적이다 못해 불확실성의 극치를 달리는 인생에 있어서 구체적인 목표는 오히려 자기의 성장을 사로잡는 스스로의 족쇄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구체적인 목표가 실현되지 않았을때의 절망감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결합할때 받게 될 데미지는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비현실적인 꿈은 일치감치 접어라...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지독히 현실적이다. 단독직입적으로 물어보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 백이면 백 모두 “꿈을 꾼다고 해서 모두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시인한다.


긍정적인 사고, 꿈을 꾸면 이룰 수 있다. 희대의 사기책인 “시크릿”에서도 보면 계속 긍정적으로 그 꿈을 생각하면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차라리 체게바라의 ‘우리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꾸자.’란 말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저자는 비현실적인 꿈은 접고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라고 말하면서 재능을 찾는 과정을 정비하라고 한다. 환상, 취미, 재능으로 분류하는데 환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분야를, 취미는 상황만 도와준다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재능은 최고가 될 수 있는 분야를 말한다. 그리하여 환상에 대한 망상은 일찌감치 접고 재능을 키우고 취미를 활용하는 것을 권한다. 효과적인 분류법이다. 여기서 관심의 원과 영향력의 원을 떠올릴 수가 있는데 관심의 원이란 환상 그리고 취미의 바깥쪽이고 영향력의 원은 취미의 안쪽과 재능이 될 수 있겠다.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본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측 불가능하기때문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융통성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정말이지 그런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다시 예측 불가능과 불확실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멀티태스킹과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네럴리스트로 상황을 극복하라고 한다. 깊고 좁게 아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폭넓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리더는 세부적인 것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큰 그림을 봐야한다는 말과 유사하게 들린다. 하나의 분야에 고집하다 열려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앞서 얘기한 원의 중심에서 출발한 가능성의 원에 대한 이야기와도 맞물려 있는 듯 하다.


나는 제대로 된 자기 PR을 ‘M뒤집기’라고 부른다.나를 뜻하는 Me의 M을 뒤집으면 우리를 뜻하는 ‘We’가 된다. 이처럼 나 아닌 우리를 먼저 알리는 자랑은 얼마든지 해도 괜찮다


자기의 성공사례를 많이들 얘기하라고 한다. 자기 PR의 일종으로 말이다. 중간이하 말단까지는 눈에 띄기 위해 통하지만 중간급 이상이 되면 팀플레이가 필요하다. 매니저가 팀의 중요성보다 자기의 성공, 자기의 코칭능력과 매니지먼트만 자랑한다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결국 M뒤집기처럼 눈에 뜨이기 시작하면 나보다는 팀플레이를 우선시 하는 행동은 성공하기 위한 필수요소가 될 것이다.


첫째, 연줄은 일단 기회의 문까지는 데려다 준다. 둘째, 연줄은 여러분을 기회의 문 안에 계속 머무르도록 도와주지는 않는다.


현대사회에서는 휴먼 네트워킹이 중요하다고 한다. 직장에서 줄타기가 아니라 인적 네트워킹을 통해 필요한 일을, 필요한 정보들을 얻고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다. 연줄과 줄타기는 조금은 상이한 것 같지만, 말그대로이다. 연줄을 통해 기회의 문까지 가서 그들이 원하는 능력을 보여주면 문안에 머무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화려한 연줄은 오히려 부끄러움을 자아내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면 일을 가족과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라. 가족보다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 나가야한다. 가족에게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다른 무엇보다 가족이 우선이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가족보다 일이 우선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Work and Life Balance. 회사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직장동료들은 일과 가족 사이에 균형을 잡으라고 이 말을 많이 해준다. 이 말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일과 가족사이의 균형을 잡기란 대단히 힘들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힘들다고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인정할 것 인정하자인 것이다. 한 쪽을 완전히 잡기 위해서는 다른 한 쪽을 놓칠 수 밖에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어떻게든 가족들을 위한 짬을 내라고 한다. 하아. 해법도 쉽지 않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일과 가족에게 분배하는 시간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인데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말로는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일의 성과에서 얻는 기쁨을 어찌할것인가. 지금은 나로서도 선택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잠을 줄여서 시간을 배분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의 뒷장의 내용들은 다른 성공학과 자기계발서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앞부분의 강렬한 워딩을 통해 충분히 몰입을 시켰고, 뒷부분은 웜다운으로 생각의 온도를 유지시키는 데에 충분했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세가지의 성공조건을 말한다. 첫번째 똑똑해야 하고 두번째 자신의 일을 인생의 최우선 목표로, 그게 아니면 최우선에 가까운 목표로 삼아야 하고 셋째로 정직하라고 한다. 책 서두에서 기존의 성공에 대한 관념적인 부분을 깨면서 관심을 집중하고 뒷부분은 평이하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정리를 했다. 서두를 제외하고는 여타 책들과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 계발에 대한 나의 죄책감을 앞에서 없어주었다고나 할까?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겐 이 책의 앞부분, 책의 절반만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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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제리 하비/ 엘도라도/2012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조직 속에 포함되어 살아간다. 처음은 가족, 학교 그 다음은 회사로 발전되어 간다. 창의성을 발휘하면 박수를 쳐주는 시간 속에서 점점 창의성은 고사하고 조직의 룰에 따라 시키는 대로만 해라로 점점 변질되어간다. 그러나 그 왜곡되어가는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난 정이 돌을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한국에서는  대다수의 무리 속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을 다른 나라보다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내가 말하는 방식은 '이야기를 말하는'방식과 같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문제는 내가 하는 말이 과연 나의 이야기, 즉 나의 진실이냐 하는 것"



생각되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서문을 읽다가 이 문장에 눈에 들어왔다. 나의 진실이냐 아니냐. 저자는 자기의 말이 너무 복잡한 경향이 있고 설교조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에 부정적이었지만, 이내 인정하기로 한다. 그래 나도 복잡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으니깐, 그냥 그게 내 말이라고 인정하자. 문제는 이야기가, 말이 진.실.하냐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하는 과정은 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 책의 원제는 애빌린 패러독스이다. 저자가 처가집에 가서 장인어른이 시작한 애빌린에 식사하러 가자는 말에 모두 동의를 하고 왕복 100여킬로를 다녀온다. 탈진한 그들은 저자의 “그래도 괜찮았죠?”라는 말에 사실은 원래 가고 싶지 않았다며 장인은 딸부부를 위해, 저자는 장인어른을 위해 싫지만 다녀온것을 토로하면서 본질적인 의도와는 다른 잘못된 결정에 모두 동참하면서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것을 에빌린 패러독스라 명명했다. 



애빌린 패러독스에 빠지는 5가지의 원인은 불안감, 부정적인 상상, 실질적인 위험, 소외에 대한 두려움, 성공과 실패의 심리적 역전이라고 한다. 조직에서 분리될까봐 두려워하는 인간의 소외감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주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기술, 경쟁, 개인주의, 일시성, 이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외로움의 공포는 자주 경험하지만 유대관계가 주는 만족감은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소외의 현실은 배웠지만 유대관계의 상호 호혜적인 기술은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이미 지구상에서 멸종한 공룡들처럼 자기 파괴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성향이 있는 조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잘못된 의사결정인 줄을 알면서도 조직에서 소외될까봐 자신의 생각과는 반대로 동의하면서 일을 몰고가는 조직원들. 어디서나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자신의 경험담에 비추어 앞에서 말한 에빌린 패러독스라고 말한다. 에빌린 패러독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맞서서 스스로 해낸 인생의 승리를 맛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혼자다. 가끔 사랑이나 감동, 창의적인 일로 고독감에서 탈출하기도 하지만 그런 환희의 순간들은 모두 우리가 끌어다 모은 빛의 덩어리일 뿐, 그 빛의 가장자리에는 칠흑같은 어둠이 있을 뿐이다.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글을 읽는 내내 사람의 소외감에 대해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사람은 혼자라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소외감이라는 느낌을 경험해본적이 있는 나로서는 혼자라는 말에 대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을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대하라.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로널드 D.랭은 "사람을 개인화된 주체(주관적으로)로 대하지 않고, 비개인화된 객체나 사물(객관적으로)로 대하는 것이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한다"고 지적했다.

황소케구리들은 케구리들을 객관적으로 다루려 한다. 그들은 케구리들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그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배제한 대가로 자신도 하나의 대상, 즉 사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성의 본질을 스스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조직이 조직원을 케구리-사회는 습지로 묘사-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케구리와 달리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객.관.적.이 눈에 띄었다."객관적으로 보자면,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객관적으로 얘기하면" 나는 얼마나 많은 객관을 남발하고 있던가. 객관적으로 말하는 그 상태가 객관적이지 않은데 말이다. 남발하는 객관성 속에 분명한 것은 나의 본질 또한 흐려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사리에 맞게 행동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얘기하면서,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라며 나치에 적극 동참한 아돌프 아이히만과, 성경 속에 하느님의 명령에 아들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비 이성적인 얘기가 예시로 나온다. 이 둘은 관료주의의 상징으로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암묵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조직에 속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관료주의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깰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원론적인 얘기로 돌아간다. 저자는 그  맹목적인 신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기를 말하고, 무엇이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겨가서 다른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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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위험한 자극에 끌리는가/ 디어드리 배릿/ 이순/2011




자극적인 제목이다. 네이밍에서 이미 본문에 나온 ‘초정상 자극’을 이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학문의 방향은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학조차 타인을 볼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는 연관성에서 든 생각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모형에 반응하는 초정상 자극에 대해 내용에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가 본다.



인간의 본능은 1 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수렵채집을 하던 생활에 맞게 설계되었다.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는, 인구 밀도, 기술혁신, 오염의 급격한 증가 때문에 그 본능들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진화는 그렇게 급속한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고, 이는 대부분의 현대적인 문제를 일이키는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동물학은, 동물의 본능이 자연환경과 단절되었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바로 초정상 자극(Super Normal Stimuli)이다.



생물학이나 동물학을 하는 다윈주의 신봉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전과 후를 기준으로 세상을 나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짧은 핸드북으로 읽은 적은 있지만, 기억나는 것은 환경에 선택받은 종이 생존에 성공해서 진화를 이룬다였던 것 같다. 하지만 동물에 국한했지 사람에게 적용해서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인간은 동물이라는 상위 범주에 들어가는데도 말이다. 나 스스로가 동물이라는 범주와 인간이라는 범주를 다른 카테고리로 나누고 있는 탓이리라. 인간의 진화는 산업과 환경의 급속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진화의 속도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해서 현대적인 문제가 생긴다...라. 진화론을 언급한다. 본능이 자연환경과 단절되었을 때 초정상 자극이 나타난다고 한다. "초정상 자극"이라는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 이 단어가 지금은 생소하지만, 책의 진도가 나간만큼 알게 되리라 본다. 인간은 초정상 자극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어떤 달콤한 과일보다 달콤한 사탕, 아기보다 눈이 큰 동물인형, 포르노 그라피 등이 그런것이다. 이런 것들이 초.정.상.자극의 예시이다.



새들의 사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표현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된다. 이것이 조류관찰의 가치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가장 잘 인식한다.



동물학자 니코 틴버겔은 동물행동과 인간의 연관성에 집중했다. 조류를 관찰하면서, 인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들리지가 않는다. 몇 시간 전에 난폭하게 운전하는 차량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그런순간 나의 운전 습관이 떠올라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항상 전신거울로 나를 비춰 볼 수 없는 바, 타인의 행동을 통해 나를 떠올린다. 심지어는 동물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니코 틴버겔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동물학이 재미 있는 건, 동물의 행태를 보면서 인간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TV에 나오는 동물의 왕국에서, 우두머리를 두고 무리짓는 동물을 보다가 직장생활을 떠올려 본 적은 없었던가? 동물의 왕국과 인간의 조직생활은 분명 닮았던 것 같다, 그 어.떤. 점에서 말이다.



개미는 단순한 뇌와 신경계를 가진 아주 이상한 친척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은 대단히 복잡한 사회집단을 이루고 산다. 일개미와 "병정"개미가 둥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과 생식력이 없는 것을 보고 윌슨은 인간의 행동에도 이타심이 적용될 수 있다는 이론에 이르렀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는 동성애가 이른바 "삼촌 효과"를 통해 생존가치를 주장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런 너무 많이 나가신게 아닌가...하버드의 생물학자 윌슨은 동성애를 저렇게 해석한다. 깜짝 놀라서 밑줄을 그어버렸다. 동성애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니...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윌슨의 주장들-인간의 개인차가 유전적, 인종에 기초한 차이도 있다고 주장-에 페미니스트 및 여러 비판자들은 학습과 사회화가 미치는 영향을 경시했다고 강한 문제제기를 했다. 윌슨박사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미를 보면서 인간의 행동에도 연관지어 동성애까지 해석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한국에서는 일종의 금기어에 가까운 단어가 이렇게 표현되어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동(생)물학이 점점 더 궁금해질 따름이다.



진화심리학 입문서에서 레다 코스미데스와 존 투비는 "우리의 현대적인 두개골에 석기 시대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하길 좋아했다.



현대적인 두개골에 석기 시대의 마음이라. 갑자기 내가 석기시대로 돌아가 맨몸으로 몽둥이를 들고 작은 토끼라도 잡으러 나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아마 한마리도 못잡고 돌에 발바닥을 찔려서 엉엉 거리고 있으리라... 진화심리학자들은 뇌를 생물학적 컴퓨터로 보고 있다. 인류 조상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의 회로에서 진화한 회로가 지금의 현대인의 것이라고 한다. 어렵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가 석기시대부터 진화해서 지금의 정교한 사고 회로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간단하게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은 실제보다 훨씬 복잡한 회로를 거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냥 문구의 느낌만 기억하자. 현대적 두개골에 석기 시대의 마음으로, 나의 두개골엔 석기 시대부터 2012년까지 달리고 있다고...아 그러면 선캄브리아기는 없을라나?



여자들에겐 두 종류의 매체가 초정상 자극의 역할을 한다. (1)이상적인 매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미지들과 충고, (2) 로맨스 소설과 멜로 드라마 같은,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매체가 그것이다.



진짜보다 더 강력한 모조품, 초정상 자극에 대해 슬슬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눈에 띄게 잘팔리는 것은 무엇이든 일종의 초정상 자극일 가능성이 높다는 본문의 글.



패스트푸드와 이기적인 광고주들이 우리에게 기름진 음식, 설탕, 소금에 대한 간절한 욕구를 만들어 준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우리는 그런 물질들에 대한 욕구를 진화시켰다. 그런 물질들이 희소했고, 한 조각이라도 발견하는 것이 생존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물질들을 가득 담은 모형 음식들이 자동판매기처럼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푸드코트에서 길을 잃은 수렵채집인들이다.



인간은 왜 위험한 자극에 끌리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초정상 자극때문이다. 실제보다 더 자극적인 실제같은 모형에 더 끌리는 현상. 이 자극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실제를 망각해버리기가 쉽다. 실제 과일보다 더 단 캔디. 실제(?) 음식보다 더 기름진 패스트푸드...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초정상자극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낸 초정상 자극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는 것이다. 상상은 달콤하고 현실은 쓰디쓸 수 있다. 상상이라는 초정상 자극은 워낙 강렬해서 매혹되기 일쑤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로 돌아와서 맞닥뜨려야한다. 초정상 자극은 실체가 아니다. 나라도 먼저 노트북 안에 담긴 헐벗은 여인네들 사진을 지워버려야 겠다. 모형알을 치우고 실제적인 알을 품어야 하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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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엘도라도/2012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 근본적인 명제에 대한 질문.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죽음은 '나쁜'것일까?


죽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상상해보자. 이 말이 옳다고 한다면 죽음은 결코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단 내가 죽었다면 죽음은 절대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죽음이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게 아무런 피해를 입힐 수 없는데 어떻게 죽음을 나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음은 당연히 내게 나쁜 것이 아니다.


프롤로그부터 형이상학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슬픈장면을 넣지 않았다는 것이 한결 책을 잡기 편하게 해주는 것 같다. 또 철학적 사유에 기반으로 한 질문들이 맘에 든다.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많은-특히나 종교적으로-주제를 가지고 시작하게 하는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데카르트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이성적, 논증적으로 풀어가는 서문부터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육체적 죽음 이후에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육체적 죽음 이후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구성돼 있으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에서 부터 시작을 한다. 책에서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과 인간은 한가지의 요소-육체-로 이뤄져 있다고 보는 일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원론자에게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죽음이라는 건 육체와 영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는 사건이라 하고하지만, 일원론을 주장하는 물리주의자들은 인간이란 다양한 P기능-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대화하고 사랑하는 등-을 수행하는 육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죽음이란 P기능의 종말이다. 말이 말을 부른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쉬이 넘어가지지 않는다. 한 때, 카톨릭 사제를 꿈꾸웠던 자로서 이원론자들의 이야기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왔었고 의심을 품지 않았다. 불편하다.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것에 대해 퀘스천 마크를 들어보이자 사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원론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자꾸 목에 걸린다. 논리적인 증명으로 풀어나가는 문제들만 보아온 이과생의 찌꺼기 지식이 일원론자의 주장에 눈이 가게 만드는 것인가?


1)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2) 결정론에 지배를 받는 존재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3)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4) 그러므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영혼+물리적인 존재의 조합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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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들 모두 '확률적'이라고 설명한다. 즉, 기초 물리학의 세계에서 결정론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명제들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영혼+육체(물리적인 존재)라는 말-영혼은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각 명제가 참이어야 한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중요하다. 책 속에서는 이원론자도 일원론자도 확실히 증명할 수 없는 상태라 한다. 즉, 무승부의 상태. 

물리론자의 반론 중에 나온 것이 기초물리학의 근간인 양자역학. 또 나왔다. 양자역학. 불확실성의 원리. 우물에서 입자가 존재할 확률. 갑자기 양자역학이 눈에 보이자 친한 친구를 만난듯한-물론 그 친구입장에선 나랑 친하지 않다-느낌이다. 삼천포로 빠지는 순간...

일원론자와 이원론자, 자유의지와 결정론, 양립주의, 양자역학까지...

별안간, 꿈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창한 하이덴베르그 아저씨가 나올 거 같다....


플라톤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면 아름다움을 '띠고'있다. 다양한 차원에서 아름다움을 '공유하고'있다. 하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와는 다르다.


완벽한 아름다움, 완벽한 정의 나 완벽한 원형은 상.상.해볼 수는 있지만, 일상적. 경험적 세상 속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라니...완벽함은 오로지 상상과 이성적 사고에서 기반한다고 한다. 글을 따라 읽으면서 완벽한 아름다움까지는 못갔고 완벽한 원형은 만들어보았다. 그렇구나...완벽한 원형은 상상은 가능해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해준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지금 내가 살아있다면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이미 죽었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내가 죽고 없는데 대체 무엇이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얼핏 보면 궤변론 같고, 뫼비우스의 띠마냥 안과 밖이 다를 것 같지만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문장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죽음 그 자체는 죽은 본인에게는 나쁜 것이 아니다-이성적으로 사고해보면- 다만 죽음으로 인해 살아있을때 누릴 수 있는 기쁨들에 대한 박탈감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별에 대한 슬픔이 나쁜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존재하고 있을 때의 얘기로, 내가 나쁨을 지각 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점점 더 저자의 인간이란 P기능을 수행하는 육체라는 물리론으로 빠져 드는 것 같다.


누군가 진지하게 자살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정말로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자살을 선택하고자하는 이유는 대체로 삶이 죽음보다(비존재하는 것) 괴롭다고 느낄때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런 선택으로 떠오르는 때는 대체로 당사자가 심각한 고통을 겪거나 감정의 나락에 떨어져 있을때 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다. 뒷 부분에서는 도덕성에 대한 관점에서도 자살을 살펴보지만,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자살은 최선의 선택이 아닐 것이라는 늬앙스를 받게 된다. 자살에 대한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말 처음부터 혼란이 오는 것은 ,인간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먼저 떠오른데 말이다.


죽음이라는 인간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주제를 철학적인 접근으로 바라본 책이다. 앞의 8장까지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다루고 있어서 읽는데 속도가 쉬이 나지 않았다. 이후로는 내용이 재밌어지고-케이건 교수가 직접 그린 그림들도 나온다- 좀더 쉬워지는 것 같다. 뭔가 비논리적이지만 한번도 그 명제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지 못한 '죽음', 그 곳에 철저한 논리의 사유를 통한 과감한 돌직구. 내가 한번도 의심을 품어보지 않은 그 근본적인 명제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책이다.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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