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발견/조안 B. 시올라/다우/2010


 일(Work)이란 생산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이나 정신을 쓰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크세노폰은  사람들이 생의 좋은 것들을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일이라고 했고, 호모는 인간을 미워한 신이 앙심을 품고는 인간을 고생시키는 것을 일이라고 하기도 했다. 창세기의 시작이 있었다면 그 시작과 함께 나타난 단어가 이 ‘일’이 아닐까?


  “이제 일하러 갑니다.”, “제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해야지요.”, “전 제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 “제 꿈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에요.” 다양한 의미로 일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문서작업을 얘기할 때도 있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을 말할 때도 있다. 노동자로서 일의 의미는 어떠할까? 나의 아버지는 평생 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졍년퇴직을 하셨다.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 였을까? 가족을 먹이고 따뜻한 옷과 집을 제공하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이제는 일을 하고 있지 않으신 아버지를 볼 때면 나의 일의 의미와 아버지의 일의 의미는 같은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때가 있다.  


 아버지세대가 일을 하던 때에는 우리나라도 종신고용이 널리 퍼져있었다. 한 직장에 들어가면 퇴직할 때까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IMF를 겪으면서 종신고용은 없어지고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미명아래에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런지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떤이에게는 생계의 수단이고 어떤이에게는 이상의 실현인 일을 다른 이의 결정에 의해서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을 소개 받을 즈음에 우리 회사도 드디어 희망퇴직을 받으면서 이 회사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나가는 사람들이 나왔다. 일의 발견. 부제는 왜 ‘일’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는가이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의 변화에 이 책의 제목보다 부제가 눈에 더 오래 담겨 있었다.과연 우리는 일을 통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시장이나 고용주의 손에 맡겨두는 결과를 가져온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something more)‘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용주들은 자기개발이나 자아실현같은 다양하고도 추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는다. 이것은 악순환을 가져온다. 고용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경영자들 또한 더 많은 것을 약속한다. 그리하여 고용인들은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고, 양측 모두 이상적인 일터를 찾아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프롤로그에서 나아갈 바를 한 문단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원하고 고용주는 동기를 부여할 방법을 찾으면서 악순환의 어둠 속으로 가게 된다. 일에 대한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너무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잘못된 것인가? 결국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느껴진다.


모리스는 일이 삶의 빛이 될 수도 혹은 삶의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첫 번째의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방면 두 번째의 경우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모리스에 따르면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원하도록 하고  그 일을 할만 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희망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목표 혹은 희망을 가진적은 없지만, 일을 통해서 뭔가를 더 얻을 수 있고 내가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던적은 없었다. 만약 희망을 줄 수 없는 일이라면 삶의 짐이되어 나를 고달프게 하고 출근하기 싫어질 것이 분명하다. 


가치 있는 일은 휴식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 일을 통해 만든 것을 사용함으로써 느끼게 될 즐거움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일상적인 창조의 기능에서 느끼는 즐거움에 대한 희망을 수반한다


백수란 일할 자유가 없기에 여가를 즐길 자유조차 박탈당한 것이라고 한다. 일을 하게 됨으로써 휴식은 달콤하고 즐거워진다. 일을 하지 않는 휴식의 연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기술을 연마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직업을 갖고 싶어하리라는 점에서 ‘가치있는 일’은 객관적이다.


현재에서 가치 있는 일을 떠올려 본다. 전문가 장인이라는 직업들. 유명한 작가라고 생각해 볼때 그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작품을 하기위한  충분한 여가와 고품질의 유용한 산물 - 작품-이 나오는면에서 갖고 싶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치 있는 일에 대한 직업에 대한 종류는 워낙 많지만 지금은 많이 떠오르지 않으니깐 일단 여기까지.


장인과 전문가는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의 공통점이 있다.  

1) 일과 여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

  1. 그들의 일은 그들 존재의 직접적인 확장이다
  2. 일에대한 헌신으로 사회구성원의 존경을 받는다
  3. 독립적이다


장인과 전문가의 공통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독립적이라는 것으로 누구도 그들이 일을 하고 있을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서두에 나왔다 나의 일을 하느냐, 남의 일을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아마도 사람들이 전문가나 장인을 꿈꾸는 것은 이상적인 유형의 노동자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독립적인 부분에 좀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즉 고용되어 일할 때에는 고된 일과 더 나은 삶을 동일시 하기 어렵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과 관련된 문제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옳다. 자유와 권력 혹은 통제를 위한 투쟁은 오랫동안 주인과 노예들, 영주와 농노들, 그리고 고용주와 고용인들 사이에 존재해왔다. 그것은 일과 관련된 주요한 문제이다.


역시나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는가에 따라 일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이 책의 두번째 파트에서 그 부분을 좀더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결국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닐까? 전문가가 되고 싶고 일과 관련된 사실들은 이미 산업이 어느정도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 정의는 이미 나온것 같다.


폴 퍼셀은 자신의 책<계급>에서 한 사람이 직업에서 누리는 자유의 양이야말로 임금보다 나은 계급의 지표라고 주장한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직장에서의 자유를 시장에서의 자유와 교환하고자 했다. 계약제 하인과 산업 노동자가 장시간의 육체노동을 그들의 알량한 아메리칸 드림과 교환했다면, 조직인은 영혼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자유를 얻기 위한 인류의 투쟁역사는 매우 길다. 그 자유를 얻고 나서 다시 우리는 자유를 저당잡히고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예전의 육체 노동자들은 근로시간이 종료되면 자유를 얻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24시간 일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걸 보면 일의 역사는 자유주의로 간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로 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이런 느낌을 본문 속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다고 믿기를 바라지만, 사실 고용인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대가이다.”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따금씩 조직 내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노출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직장에서 이렇게 선을 긋기란 때로 쉽지 않다. 이 가느다란 선은 당신이 하게 될 일의 양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사생활과 내적 자아, 그리고 당신이 일을 하는데 필요한, 보다 공적인 측면들 사이에 경계를 긋는 것이다....얼마만큼 보여주고 얼마만큼 숨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조직내에서 사생활을 어느 정도를 노출시켜야 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문제이다. 과연 이것은 조직의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고용인의 모든것을 통제하에 두려는 회사의 편의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는 현실에서도 곳곳에 숨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면 관리하고 통제하기에는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사유하지 않는 기계가 아닌 이상 통제 받기 보다는 자유를 꿈꾸고, 고용인과 고용주는 이 미묘한 선에서 눈치를 볼 것이다. 물론 더 많은 눈치는 고용인쪽에서 이겠지만. 


완전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한 근로자들에게 있어 일의 가장 힘든 부분은 정서적인 노력이다. 왜냐하면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출구는 없다>>의 주인공이 말했듯이 “타인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너무 자극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 자체뿐만이 아니고 그외에 그 일을 둘러싼 환경_사람을 포함한_을 보자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일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것의 또 다른 이점은 그것이 극적으로 뛰어난 기술, 목적에 대한 고귀한 헌신, 그리고 완벽함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오늘날 스포츠팀은 점점 더 사업가처럼 활동하는 반면, 회사 조직들은 고용인들로 하여금 보다 더 스포츠팀처럼 행동하도록 장려한다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반어적인지에 주목한다. 대형스타가 게임과 팀의 급료 전부를 차지하는 프로 농구는 팀워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여느 회사를 가도 들을 수 있는 팀워크란 말이 있다. 팀워크를 향상시키기 위한 워크샵도 한다. 어떻게 하면 한 팀으로서 성과를 이룰 수 있을까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스포츠는 사업처럼, 사업은 스포츠처럼 활동하는 이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가 동경해 마지 않는 미국 프로스포츠는 스타플레이어가 이끌어간다. 회사에서도 스타플레이어 하나가 회사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팀워크에 대한 환상만으로 어물쩡 넘어가는게 아닐까?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팀워크에 대한 그 답이 될 것이다.


회사내의 팀들은 대부분 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분좋게 느끼기 위해 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불과하다....무엇보다도, 팀에서 일하는 것의 매력 중 하나는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게임에 참여하는 데 의의를 두거나 패배하는 것뿐인 팀에서 일하는 것은 어떠한가?


그렇다. 팀을 비롯한 수많은 경영혁신들은 사람들에게 일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주었는가...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가장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회사원들까지도 고용주들에게 배신당할 수 있다면, 누구의 직장도 더는 안전할 수 없었다. 그들은 회사에 충성하는 조직인이었다. 직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소득, 연금, 친구, 평판, 심지어 가족까지 잃는 일도 있다. 그들이 일한 세월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조직이 약속했던 것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일만 잘하면 은퇴할때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묵언의 사회적 계약을 고용주들과 맺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IMF구제금융위기가 왔을때 많은 회사들이 구조조정을 했고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원들이 회사 밖으로 나왔다. IMF를 탈출하고 나서 기업은 노동의 유연성을 주장하면서 여러가지 핑계로 고용인을 해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막상 닥쳐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 혀를 차면서 걱정했지만, 그 일이 현실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심지어 우리나라보다 이직과 재취업이 많은 미국에서도 이런 일들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직장을 잃으면 한 사람의 신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말이 더 가혹하게 적용된다. 


직장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만들려는 1980년대의 시도는 많은 근로자들이 의심했던 대로 모두 거짓이엇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처럼 “집이란 가고 싶을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 언제든 당신을 받아주어야 하는 곳”이다. 


가족같은 회사.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아니 많이 들리는 문구이다. 가족이라면, 왜 회사의 보다 나은 경쟁력확보를 위해 해고를 해야하다는 말인가. 회사는 가고 싶을때 언제든 갈 수 있고 언제나 나를 받아주는 곳은 아닌 것이 아니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형용사와 부사로 꾸며진 달콤한 문구는 종종 우리를 착각하게 만든다. 문구는 가족같은 회사이지만, 현실은 가족같이 보이고 싶은 회사일지 모르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일과 삶에까지 얘기한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현대인의 일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책을 덮을 때까지 거두지 않고 줄기차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삶 자체가 편해져야 할 시대에 이르러서도 유급고용이 삶을 지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고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내내 일에 대한 의문을 떠올렸고 내가 고용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던 것 같다. 

 서점에 가면 많은 수의 경제경영서들이 즐비하게 깔려있다. 생각해보면 이 카테고리의 책들은 고용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의미에서 ‘일의 발견’은 고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신선한 책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은 그것을 위해 현재 포기하고 있는 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는가?” 

일을 통해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를 다시 한번 반문해 본다.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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