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위험한 자극에 끌리는가/ 디어드리 배릿/ 이순/2011




자극적인 제목이다. 네이밍에서 이미 본문에 나온 ‘초정상 자극’을 이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학문의 방향은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학조차 타인을 볼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는 연관성에서 든 생각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모형에 반응하는 초정상 자극에 대해 내용에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가 본다.



인간의 본능은 1 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수렵채집을 하던 생활에 맞게 설계되었다.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는, 인구 밀도, 기술혁신, 오염의 급격한 증가 때문에 그 본능들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진화는 그렇게 급속한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고, 이는 대부분의 현대적인 문제를 일이키는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동물학은, 동물의 본능이 자연환경과 단절되었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바로 초정상 자극(Super Normal Stimuli)이다.



생물학이나 동물학을 하는 다윈주의 신봉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전과 후를 기준으로 세상을 나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짧은 핸드북으로 읽은 적은 있지만, 기억나는 것은 환경에 선택받은 종이 생존에 성공해서 진화를 이룬다였던 것 같다. 하지만 동물에 국한했지 사람에게 적용해서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인간은 동물이라는 상위 범주에 들어가는데도 말이다. 나 스스로가 동물이라는 범주와 인간이라는 범주를 다른 카테고리로 나누고 있는 탓이리라. 인간의 진화는 산업과 환경의 급속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진화의 속도가, 변화의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해서 현대적인 문제가 생긴다...라. 진화론을 언급한다. 본능이 자연환경과 단절되었을 때 초정상 자극이 나타난다고 한다. "초정상 자극"이라는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 이 단어가 지금은 생소하지만, 책의 진도가 나간만큼 알게 되리라 본다. 인간은 초정상 자극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어떤 달콤한 과일보다 달콤한 사탕, 아기보다 눈이 큰 동물인형, 포르노 그라피 등이 그런것이다. 이런 것들이 초.정.상.자극의 예시이다.



새들의 사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표현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된다. 이것이 조류관찰의 가치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가장 잘 인식한다.



동물학자 니코 틴버겔은 동물행동과 인간의 연관성에 집중했다. 조류를 관찰하면서, 인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상.하.게.들리지가 않는다. 몇 시간 전에 난폭하게 운전하는 차량을 보며 나는 혀를 찼다. 그런순간 나의 운전 습관이 떠올라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항상 전신거울로 나를 비춰 볼 수 없는 바, 타인의 행동을 통해 나를 떠올린다. 심지어는 동물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니코 틴버겔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동물학이 재미 있는 건, 동물의 행태를 보면서 인간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TV에 나오는 동물의 왕국에서, 우두머리를 두고 무리짓는 동물을 보다가 직장생활을 떠올려 본 적은 없었던가? 동물의 왕국과 인간의 조직생활은 분명 닮았던 것 같다, 그 어.떤. 점에서 말이다.



개미는 단순한 뇌와 신경계를 가진 아주 이상한 친척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은 대단히 복잡한 사회집단을 이루고 산다. 일개미와 "병정"개미가 둥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과 생식력이 없는 것을 보고 윌슨은 인간의 행동에도 이타심이 적용될 수 있다는 이론에 이르렀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는 동성애가 이른바 "삼촌 효과"를 통해 생존가치를 주장한 최초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런 너무 많이 나가신게 아닌가...하버드의 생물학자 윌슨은 동성애를 저렇게 해석한다. 깜짝 놀라서 밑줄을 그어버렸다. 동성애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니...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윌슨의 주장들-인간의 개인차가 유전적, 인종에 기초한 차이도 있다고 주장-에 페미니스트 및 여러 비판자들은 학습과 사회화가 미치는 영향을 경시했다고 강한 문제제기를 했다. 윌슨박사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미를 보면서 인간의 행동에도 연관지어 동성애까지 해석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한국에서는 일종의 금기어에 가까운 단어가 이렇게 표현되어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동(생)물학이 점점 더 궁금해질 따름이다.



진화심리학 입문서에서 레다 코스미데스와 존 투비는 "우리의 현대적인 두개골에 석기 시대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말하길 좋아했다.



현대적인 두개골에 석기 시대의 마음이라. 갑자기 내가 석기시대로 돌아가 맨몸으로 몽둥이를 들고 작은 토끼라도 잡으러 나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아마 한마리도 못잡고 돌에 발바닥을 찔려서 엉엉 거리고 있으리라... 진화심리학자들은 뇌를 생물학적 컴퓨터로 보고 있다. 인류 조상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의 회로에서 진화한 회로가 지금의 현대인의 것이라고 한다. 어렵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고가 석기시대부터 진화해서 지금의 정교한 사고 회로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간단하게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은 실제보다 훨씬 복잡한 회로를 거쳐 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냥 문구의 느낌만 기억하자. 현대적 두개골에 석기 시대의 마음으로, 나의 두개골엔 석기 시대부터 2012년까지 달리고 있다고...아 그러면 선캄브리아기는 없을라나?



여자들에겐 두 종류의 매체가 초정상 자극의 역할을 한다. (1)이상적인 매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미지들과 충고, (2) 로맨스 소설과 멜로 드라마 같은,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매체가 그것이다.



진짜보다 더 강력한 모조품, 초정상 자극에 대해 슬슬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눈에 띄게 잘팔리는 것은 무엇이든 일종의 초정상 자극일 가능성이 높다는 본문의 글.



패스트푸드와 이기적인 광고주들이 우리에게 기름진 음식, 설탕, 소금에 대한 간절한 욕구를 만들어 준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우리는 그런 물질들에 대한 욕구를 진화시켰다. 그런 물질들이 희소했고, 한 조각이라도 발견하는 것이 생존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물질들을 가득 담은 모형 음식들이 자동판매기처럼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푸드코트에서 길을 잃은 수렵채집인들이다.



인간은 왜 위험한 자극에 끌리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초정상 자극때문이다. 실제보다 더 자극적인 실제같은 모형에 더 끌리는 현상. 이 자극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실제를 망각해버리기가 쉽다. 실제 과일보다 더 단 캔디. 실제(?) 음식보다 더 기름진 패스트푸드...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초정상자극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낸 초정상 자극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는 것이다. 상상은 달콤하고 현실은 쓰디쓸 수 있다. 상상이라는 초정상 자극은 워낙 강렬해서 매혹되기 일쑤이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로 돌아와서 맞닥뜨려야한다. 초정상 자극은 실체가 아니다. 나라도 먼저 노트북 안에 담긴 헐벗은 여인네들 사진을 지워버려야 겠다. 모형알을 치우고 실제적인 알을 품어야 하니깐 말이다.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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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엘도라도/2012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그 근본적인 명제에 대한 질문.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죽음은 '나쁜'것일까?


죽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상상해보자. 이 말이 옳다고 한다면 죽음은 결코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일단 내가 죽었다면 죽음은 절대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죽음이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게 아무런 피해를 입힐 수 없는데 어떻게 죽음을 나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음은 당연히 내게 나쁜 것이 아니다.


프롤로그부터 형이상학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이나 슬픈장면을 넣지 않았다는 것이 한결 책을 잡기 편하게 해주는 것 같다. 또 철학적 사유에 기반으로 한 질문들이 맘에 든다.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많은-특히나 종교적으로-주제를 가지고 시작하게 하는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데카르트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이성적, 논증적으로 풀어가는 서문부터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하는 것 같다.


육체적 죽음 이후에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육체적 죽음 이후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구성돼 있으며....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에서 부터 시작을 한다. 책에서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보는 이원론적 관점과 인간은 한가지의 요소-육체-로 이뤄져 있다고 보는 일원론적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원론자에게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죽음이라는 건 육체와 영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는 사건이라 하고하지만, 일원론을 주장하는 물리주의자들은 인간이란 다양한 P기능-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대화하고 사랑하는 등-을 수행하는 육체라고 말한다. 이들에게는 죽음이란 P기능의 종말이다. 말이 말을 부른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쉬이 넘어가지지 않는다. 한 때, 카톨릭 사제를 꿈꾸웠던 자로서 이원론자들의 이야기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왔었고 의심을 품지 않았다. 불편하다.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것에 대해 퀘스천 마크를 들어보이자 사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원론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자꾸 목에 걸린다. 논리적인 증명으로 풀어나가는 문제들만 보아온 이과생의 찌꺼기 지식이 일원론자의 주장에 눈이 가게 만드는 것인가?


1)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2) 결정론에 지배를 받는 존재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3)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4) 그러므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영혼+물리적인 존재의 조합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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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물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법칙들 모두 '확률적'이라고 설명한다. 즉, 기초 물리학의 세계에서 결정론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명제들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영혼+육체(물리적인 존재)라는 말-영혼은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각 명제가 참이어야 한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가 중요하다. 책 속에서는 이원론자도 일원론자도 확실히 증명할 수 없는 상태라 한다. 즉, 무승부의 상태. 

물리론자의 반론 중에 나온 것이 기초물리학의 근간인 양자역학. 또 나왔다. 양자역학. 불확실성의 원리. 우물에서 입자가 존재할 확률. 갑자기 양자역학이 눈에 보이자 친한 친구를 만난듯한-물론 그 친구입장에선 나랑 친하지 않다-느낌이다. 삼천포로 빠지는 순간...

일원론자와 이원론자, 자유의지와 결정론, 양립주의, 양자역학까지...

별안간, 꿈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창한 하이덴베르그 아저씨가 나올 거 같다....


플라톤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표현을 빌리면 아름다움을 '띠고'있다. 다양한 차원에서 아름다움을 '공유하고'있다. 하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와는 다르다.


완벽한 아름다움, 완벽한 정의 나 완벽한 원형은 상.상.해볼 수는 있지만, 일상적. 경험적 세상 속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라니...완벽함은 오로지 상상과 이성적 사고에서 기반한다고 한다. 글을 따라 읽으면서 완벽한 아름다움까지는 못갔고 완벽한 원형은 만들어보았다. 그렇구나...완벽한 원형은 상상은 가능해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실감하게 해준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지금 내가 살아있다면 죽음은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이미 죽었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역시 나쁜 것이 될 수 없다.(내가 죽고 없는데 대체 무엇이 내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얼핏 보면 궤변론 같고, 뫼비우스의 띠마냥 안과 밖이 다를 것 같지만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문장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죽음 그 자체는 죽은 본인에게는 나쁜 것이 아니다-이성적으로 사고해보면- 다만 죽음으로 인해 살아있을때 누릴 수 있는 기쁨들에 대한 박탈감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별에 대한 슬픔이 나쁜 것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존재하고 있을 때의 얘기로, 내가 나쁨을 지각 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점점 더 저자의 인간이란 P기능을 수행하는 육체라는 물리론으로 빠져 드는 것 같다.


누군가 진지하게 자살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정말로 자신의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자살을 선택하고자하는 이유는 대체로 삶이 죽음보다(비존재하는 것) 괴롭다고 느낄때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런 선택으로 떠오르는 때는 대체로 당사자가 심각한 고통을 겪거나 감정의 나락에 떨어져 있을때 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다. 뒷 부분에서는 도덕성에 대한 관점에서도 자살을 살펴보지만,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자살은 최선의 선택이 아닐 것이라는 늬앙스를 받게 된다. 자살에 대한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말 처음부터 혼란이 오는 것은 ,인간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먼저 떠오른데 말이다.


죽음이라는 인간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주제를 철학적인 접근으로 바라본 책이다. 앞의 8장까지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다루고 있어서 읽는데 속도가 쉬이 나지 않았다. 이후로는 내용이 재밌어지고-케이건 교수가 직접 그린 그림들도 나온다- 좀더 쉬워지는 것 같다. 뭔가 비논리적이지만 한번도 그 명제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지 못한 '죽음', 그 곳에 철저한 논리의 사유를 통한 과감한 돌직구. 내가 한번도 의심을 품어보지 않은 그 근본적인 명제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책이다.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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