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을유문화사/ 2011



 “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게 당황스러울 것이다. 너무나도 본질적인 질문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어떻게 대답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을 정의하는 답변을 해야 하는데, 보통은 자기가 하는 일을 얘기하지 않을까싶다. 상황을 그려보면, 명함을 건네면서 저는 이러이러한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는 홍길동입니다라고 할 것 같다. 이 답변 속에서는 나라는 고유한 존재보다는 회사의 이름과 직책이 상대방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이 회사의 직무와 직책으로 얘기되어지는 것이다. 몸 담고 있는 회사와 하고 있는 일이 진정 나를 말해주는 것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를 말해 준다면,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무려 나를 ‘정의’하는 일이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보다 더 나라는 본질에 가까울 것이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나라는 본질에서 좀 더 먼 거리에 있을 것이다. 아예 하고 있는 일이 없어진 사람들은 어떨까?


 IMF를 겪으면서 한국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조직 속의 나는 없어지고 헐벗은 나만 남았다. 나를 대신 얘기해주던 명함은 고사하고 매달 나오는 월급마저 없어져 버렸다. 그 당시 실직자들은 경제 생활의 주체로서의 나와 사회속에서 나를 동시에 잃어버리는 더블 공황상태에 내몰렸다. 평생을 몸담았던 회사에서 나가게 되면서  ‘나는 뭐였지?’나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지’라는 회한을 하지 않았을까. 조직을 벗어나 홀로된 사람은 이다지도 수세에 몰렸어야 했던가하는 상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


 위기의 시절이라 해도 회사내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이상은 회사에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대체 가능한 직무라면 언젠가는 평이한 시절이라도 그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새로운 직업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없어지는 직업들이 더 많이 존재한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대체가 되고 있고 전통적인 직업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기업은 경영 활성화를 위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은 아니더라도 경영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줄 것이고 노동의 소멸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미해결과제이기 때문이다.


가치를 만드는 사람만이 언제나 필요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치의 개념은 언제나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변화를 생활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다. 아울러 그 변화의 방향을 알고, 자신의 욕망과 그것을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가치를 창출해야만 하는 시기가 점점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조직 속의 나로만 정의하지 말고 나만의 가치로 나를 정의해야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이런 변혁의 시기에 자기 변화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내라고 하는 책이다. 이 책의 키워드를 두가지를 뽑아내라면 ‘변화’와 ‘욕망’일 것이다. 나의 삶이 나의 욕망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바꾸라’는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서 사람은 병이 생기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니까 변화를 통해 나의 욕망을 흐르게 하라고 말이다.


욕망이 없는 삶은 이미 속세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욕망과 화해하고 대항해 싸우는 수도사가 될 필요가 없다. 나는 욕망을 사랑한다. 욕망만큼 강력한 모티베이션은 없다.


아파트를 몇 채를 가지고 있고, 커다란 외제차를 몇 대를 굴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것만이 욕망이 아니다. 자신의 바른 욕망은 공익에 기여하는 모습으로 실현이 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얼마나 열정이 불타오르겠는가.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행동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절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집단과 사회가 강조된 대목이다. 이 속에는 개인에 대한 몫이 과소 평가되어 있다. 어쩌면 사회라는 개념 자체가 자유와는 적대관계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교육이란, 문명의 틀 속에서 주어진 사회적 전통에 아이들을 맞추는 것이다. 근신과 절제와 동일화가 사회의 미덕으로 강조되어 왔다.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지금까지 왔다. 사회적 전통에 맞게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어쩌면 교육과 나를 둘러싼 주위를 보면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길을 그냥 걷고만 있었던 것같다. 절제와 근신은 어떻게 보면 욕망을 누르고 누르다보니 내면의 깊은 욕망을 끄집어내는 것도, 욕망을 바로보기도 버거운지도 모르겠다.


개혁은 치명적 급소를 항상 노출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혼돈과 혼란'이다. 변혁기의 특징인 카오스는 누구에게나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 세력은 그 속에서 희망을 보고, 기득권층은 그 속에서 절망을 본다.


 나의 욕망을 통해 동기부여하면서 변화를 시작하려고 할때,  혼란기를 지나가게 될 것이다. 불편한 변혁기는 일상으로 다시 회귀하려는 마음을 꿈틀꿈틀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는 것을 두려하지 말자. 변혁기에는 카오스를 만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대개의 경우 어제의 인간으로 남아 오늘을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성과 같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그대로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일단 구르기 시작하면 계속 구르려고 한다. 정지 상태와 운동 상태의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을 넘어설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이 단절은 뿌리깊은 '정지하고 싶은'관성을 극복함을 의미한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정지해 있으려고 하고 정지해 있는 사람은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한다. 익숙하고 안정화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안정화된 상태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와 전자들의 세계를 보면 바닥상태의 전자는 에너지 레벨이 제로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전자가 역동성을 띄기 시작할 때 비로서 에너지를 갖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들의 세계도 이럴진대 이런 미립자로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다를 일이 있을까. 안정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균형이 깨졌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가 되고 싶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늘 더 좋은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늘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지금의 자기 자신보다 나아지려고 애쓰다보면, 나는 언젠가 나를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다.


 내가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내가 슈퍼맨이라면, 내가 상상을 초월할 천재라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있으면 좀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좀 더 나은 모습의 나를 꿈꾸는 것이었던 같다. 나 자신을 좀더 믿고 나를 사랑하면서 변화에 한발자국씩 다가선다면 내가 되고 싶었던 존재가 되는데 가까워지지 않을까. 저 유명한 스티븐 코비박사의 말을 빌려 다시 말하자면 관심의 원은 줄이고 영향력의 원을 넓히는데 힘쓰라는 말로도 표현 할 수 있을 것같다.


 불행은 자기 밖에서, 다른 사람이 가치 있다고 인정해주는 무엇인가를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할 때부터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는 돈을 많이 가지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또 직장에서 승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한다...자기의 욕망에 솔직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세상이 부여하는 가치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타인의 욕망을 자신에게 투사하지 말자. 앞서 말했듯이 나의 내면의 욕망이야말로 본질적이고 지속가능한 동력이다. 타인의 욕망은 그것이 이루어지더라도 결국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라는 허기짐을 느낄게 분명하다.


 나는 나의 정의를 새롭게 하고 싶었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나는 누구인가가 이력서나 명함 속에 있는 나가 아닌 다른 근본적인 나로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지만, 그나마 근접한 것이  내안에 있는 욕망의 덩어리로 만들어진게 나라는 사람이 아닐까? 나의 타오르는 욕망은 내 삶의 비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나의 삶을 아름답고 멋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내 안의 혁명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익숙한 것과의 결별’ 프롤로그에 불타는 배위의 갑판에서 살기 위해 칠흙같은 바다로 뛰어들어 기적적으로 생환한 앤디 모칸이라는 선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불타는 갑판위에서 확실한 죽음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바다로 뛰어들어 죽을지도 모르는 가능한 삶을 살것인가를  화두로 던지면서 이 책을 시작했다. 이제는 앤디 모칸이 아닌 내 차례인 것 같다. 나를 다시 정의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현실이라는 불타는 갑판에서, 내 욕망을 구명조끼로 삼아 가능한 삶을 위해 변화라는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문득 나이키의 카피가 떠오른다.

 “ JUST DO IT.”




Posted by 까망봉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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